▲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
유성호
"오로지 국민만을 보고 가겠다.""민심을 받들어...""국민이 원한다면..."
정치 기사를 취급하다보니 크고 작은 선거를 앞두고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듣게 되는 클리쉐(cliche)들이다.
정치를 잘 모르거나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처음에는 '감동'으로 다가올지 모른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안다. 4, 5년 주기로 투표소에 습관적으로 서게 되는 사람들로부터 "또 그 소리냐"는 실소만 듣게 될 뿐이라는 것을.
국민들도, 어쩌다 한두 번 투표를 빼먹는다손 치더라도 수십년 지지정당의 기호를 바꾸지 않은 이들이 태반인데 가치관이 전혀 다른 이 국민의 뜻을 무슨 수로 다 받들겠다는 것인가?
한번은 답답해서 정치인들을 많이 상대해본 관료 출신 청와대 수석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정치인들은 왜 지키지 못할 말들을 남발할까요? 결국은 자기 뜻대로 할 거면서...""흠... 사실대로 얘기하면 국민들이 실망할 게 걱정되겠죠. 그리고 정치인은 꿈과 희망을 얘기해야지, 국민들이 '솔직한 얘기'를 좋아할까요?" 그의 말대로 많은 정치인들은 '꿈과 희망'을 얘기하는 쪽을 택한다. "큰소리 뻥뻥 쳐놓고 말과 행동이 왜 다르냐"는 비난이 쏟아지면 '제2의 클리쉐'가 준비되어 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후회할 일을 왜 시작했을까?)"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처음부터 '안 될 수도 있다'는 말 한 마디만 했어도...)"기득권의 벽에 부딪혀..."(남들 못해도 나는 할 수 있다 해놓고, 이제 와서 약한 모습 보이면...)
그런 점에서, <오마이뉴스>가 지난 주 만난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솔직한 정치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가 주창하는 '호남연정론'은 국민의당을 '호남의 맹주'로 밀어준 지역 유권자들의 표심을 정확히 받들고 있다.
"호남이 독자집권을 할 수 있으면 하자. 그게 불가능하면 호남의 가치와 몫을 가지고, 안철수에게라도 당당하게 요구하자는 거다...(중략) 1997년 대선 지지율 2~5% 받았던 김종필도 DJP 연합을 하면서 국무총리와 '돈 되는 장관' 자리를 다 가져갔다. 심지어 산업은행 총재, 대우증권 회장까지 가져갔다. 우리(호남)도 경제각료 7, 8자리 확보하면 예산도 가져와 지역균등 발전하자는 얘기다. 기업 유치해서 '떠나는 호남'이 아니라 '사람 사는 호남'을 만들자는 것이다."박 위원장이 언급한 김종필 이래로 소속 정당의 '욕망'을 이만큼 솔직히 드러낸 원내교섭단체 대표가 있었을까?
당장의 손해·비난 두렵다고 할 말 못한 결과는 정치혐오대선이 가까울수록 그의 소신은 호남과 엇비슷한 지역 발전의 욕구를 가진 영남과 충청 강원 등 비호남권 표심과 격렬히 부딪힐 것이다. 당장 특정지역 출신 장관직 확보와 예산 몰아주기로 대선에서 거래를 하려는 시도가 안철수가 표방했던 '새정치'와 화학적 융합이 가능하겠냐는 모순을 풀어야 한다.
그럼에도 정치인은 솔직해야 한다. 당장의 손해나 비난이 두렵다고 정말 바라는 것, 정치가 국민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못하는 것을 명확히 얘기하지 못한 결과가 오늘의 정치혐오로 돌아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정치를 아무리 화려하고 선명하게 포장하려고 해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 판이한 집단들이 협상하고 타협하는 '거래'라는 속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대놓고 지역이권을 달라고 해석될 수 있는 말을 거침없이 하는 박 위원장의 '뻔뻔함'에 질린 독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총선에서 보여준 '호남 민심'의 바다 위에 그가 떠있다는 현실도 부정할 수 없다. 야당 지지자들은 김대중·노무현·문재인의 당선을 위해 똘똘 뭉쳤던 호남이 자신의 이해에 따라 분화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상인 박지원'은 호남 시장의 좌판에 기존의 지지층에 익숙했던 '민주'와 '평등'뿐만 아니라 '기업 유치'나 '지역 발전'의 새로운 매물을 올려놓았다. 그가 먼저 나서지 않으면 마케터들은 시장의 변화를 알 길이 없을 것이다.
국민의당의 연정 파트너 1순위인 더불어민주당도 당권의 키를 쥔 인물의 속내를 알게 됐으니 받아줄 수 있는 최대치가 무엇인지 또는 거부한다면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내년 대선까지 '긴 호흡의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솔직하지 못한 태도나 언술이 더 큰 오해와 갈등으로 되돌아오는 곳이 우리 정치권이다.
새누리당의 3선 조원진 의원이 22일 오후 최고위원 출마를 선언했다. 친박근혜 성향의 그는 비박의 유승민 의원과의 관계에 대해 "이번 총선에서 약간의 문제는 있었지만 유 의원과 제가 항상 대구에서 지켜보고 있어 관계에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둘 사이에 '약간의 문제'만 있었을까?
2015년 공무원연금 대타협기구 여당측 위원장으로 원내대표 시절의 유승민 의원과 호흡을 맞췄던 그는 그해 11월 9일 유 의원의 부친상을 간 자리에서 "(내가) 초선일 때 대구 의원들이 7명 물갈이됐다"며 TK 물갈이론을 점화했다. 한때 측근이었던 유 의원을 원내대표에서 몰아내고 그의 부친상에 조화도 안 보낸 모습에서 유 의원을 내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이 확실히 드러난 상황이었다.
그 후에도 조 의원은 "헌법 위에 (박근혜 대통령과의) 사람 관계가 우선 아니냐"(2월 2일 국회 출입기자들 만남), "대구에서 유승민 의원은 박 대통령에게 가장 많은 혜택을 받았다"(2월 5일 기자간담회), "박근혜 정부에서 원내대표 했던 분이 모든 일마다 안다리 걸었다"(3월 29일 대구선대위 발대식)는 발언을 쉴 새 없이 몰아쳤다.
공격의 압권은 유승민 등 대구의 탈당파 무소속 후보들에게 박 대통령의 '존영' 반납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박 대통령을 향한 대구·경북 유권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감안하면, '존영' 같은 극존칭 사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표를 받아야 할 유권자가 대구·경북에만 있지 않다는 점도 함께 헤아려야 했다.
인정사정없이 싸우다가 선거 끝나면 손 잡는 게 정치?총선 후 1주일 뒤 대구·경북 당선인 모임에서 악수를 청하는 조 의원을 애써 외면하는 유 의원의 모습이 언론사 카메라에 잡혔다. 인정사정없이 싸우다가도 선거 끝나면 '아무 일 없이' 다시 손을 잡는 게 정치일까? 지금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조 의원의 말을 유 의원도 동의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