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그림
천년의상상
여름이 한창 무르익는 요즈음 새벽부터 해거름까지 온갖 소리를 듣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나 스스로 마을 언저리에서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그 소리에 사로잡힙니다. 나 스스로 아이들을 더 살가이 바라보면 아이들 말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만 귀에 들립니다. 바깥소리가 안 들려요.
부엌에서 도마질을 하면 내 귀에는 도마질 소리가 들립니다. 여름이라 아이를 무릎에 앉히기는 힘들지만,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아서 그림책을 넘기면 종이가 팔랑 넘어가는 소리만 들려요. 그리고 아무리 항공방제가 춤을 추더라도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을 찾아오는 온갖 멧새가 있어요.
모과알이 굵는 소리라든지, 석류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풋감이 떨어지며 지붕을 때리는 소리라든지, 물까치가 무화과를 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어요. 바야흐로 하얗게 터지려는 솔꽃(부추꽃) 소리까지 들을 수 있습니다.
정여울 님이 쓴 <마음의 서재>(천년의상상, 2015)를 읽으면서 문득 '마음으로 듣는 소리'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정말 우리는 사돈의 팔촌보다 더 머나먼 연예인들의 정보는 샅샅이 꿰고 있으면서 정작 주변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경험을 듣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 것 같다. (118쪽)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적 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신성한 힘'이 아닐까. (134쪽)책을 바탕으로 가벼이 이야기를 풀어내는 <마음의 서재>는 정여울 님 스스로 '더 많은 책을 소개하는 정보'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은 책을 홀가분하게 이야기로 엮자'는 생각으로 쓴 글이라고 합니다. 새로 쏟아지는 수많은 책을 가리거나 훑어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내(정여울) 마음'을 읽으면서, 이 마음결에 기쁨이 솟도록 북돋우던 책에 서린 숨결을 말해 보자는 뜻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서재>라고 하는 책은 우리한테 넌지시 말하는 셈입니다. '더 많은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를 굳이 찾아서 읽지 않아도 된다'고, '바빠서 한 주에 책 한 권 못 읽어도 된다'고, 그예 홀가분한 넋을 고요히 바라보면서 살림을 즐겁게 짓는 길을 걸으며 책 한 권을 곁에 두자고 하는 이야기인 셈이에요.
인어공주는 신분상승을 위해 목숨을 거는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모두가 '이룰 수 없다'고 말하는 꿈, 누가 봐도 불가능한 꿈을 향해 묵묵히 전진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친구다. (153쪽)괴물과 마주친 자들은 그를 목격하자마자 냅다 도망치거나 다짜고짜 공격한다. 괴물의 겉모습을 볼 수 없었던 눈먼 노인만이 그의 대화 상대가 되어 준다. (20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