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임의 삶을 이용한 영화 및 연극 포스터
유영호
입양 간 아들에 의해 밝혀진 진실김수임을 이용한 반공이데올로기 선전은 그후로 냉전체제의 붕괴로 점차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하지만 진실은 가려질 뿐 지워지지 않는다. 바로 김수임과 존. E. 베어드 대령 사이에 출생한 아들 김원일이 2008년 자신의 생모 김수임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그는 1949년 11월 출생하였고 사건 당시 옥인동 집에 버려지다시피 했던 인물이다. 다행히 그가 태어난 청량리위생병원 수간호사였던 안귀분의 양자로 입양됐고, 1970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러다 우연히 미국에서 자기 엄마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한 사람을 만나 그로부터 자기 아버지 베어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980년 아버지를 찾아 갔지만 당시 90세인 베어드는 "나는 사생아 자식이 없다, 넌 내 자식이 아니다"라면서 부인했다고 한다. 베어드는 1950년 조사받을 때도 자기는 사생아가 없다고 진술했으며, 김수임 재판 개시 9일 전에 출국해 버렸다.
이렇게 자기 엄마에 대한 관심은 그에 대한 자료를 탐색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기록을 찾아내게 했다. 그가 찾아낸 미 육군성 기밀문서인 일명 '베어드 파일'에 의하면 베어드 대령은 민감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없어 김수임이 북에 넘겨줄 비밀도 없었으며, 이강국을 월북시키는 데 미군 지프를 이용했다는 등의 내용도 '입증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8년 AP통신은 '미 육군 정보국 1956년 비밀자료에 의하면 이강국이 CIA 비밀조직인 JACK(한국공동활동위원단)에 고용되었다'고 보도했다. 실제로 이강국은 휴전 무렵 이승엽·임화 등과 함께 미군 스파이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남로당 스파이로 처형된 김수임에 대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봐야 할 것이다.
김수임의 아들 김원일은 "어머니는 역사라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역사에 익사한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누구도 자신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외로이 처형당한 어머니를 위로했다.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낙랑클럽김수임이 활동했던 '낙랑클럽'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주로 이화여전 출신들 100~150명으로 구성됐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후원으로 총재는 김활란이었고 모윤숙이 회장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것은 '영어를 잘하는 교양 있는 여성들에게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고급 외교를 하도록 조직한 비밀 사교 단체'였다(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2012, 기파랑). 뉴라이트 저자인 최종고의 눈에는 남들에게 '매춘'으로 보일 만한 행위도 문학적·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수임의 후배 전숙희가 "수임 언니"의 진심을 살려내기 위해 쓴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2002, 정우사)에서는 낙랑클럽은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클럽"이라고 했다. 즉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신분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책 속에서 모윤숙과 김수임의 모습은 고급 직업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또 하필이면 그 이름도 '낙랑'이다.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이 아니던가. 이웃나라 호동왕자와 사랑에 빠져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데 자신의 목숨을 바친 '낙랑공주'가 연상될 수밖에 없다. 결국 낙랑클럽은 당시 유산계급을 배경으로 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펼친 로비 활동의 일환이었다.
낙랑클럽이 처음 발족했을 때는 회현동 모윤숙의 집에서 모였지만 미군정청과 선을 대고 있던 우익 정치인이 주선해 일본인 호화 저택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아서 그곳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리더인 모윤숙이 이화여전 후배들을 사로잡았으며, 항상 옆에 있던 김수임은 '종달새'의 명랑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이끌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