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르미 그린 달빛> 보기 전에 알아야 할 '효명세자'

[사극으로 역사읽기] 절반은 정조, 절반은 사도세자였던 청년 지도자

등록 2016.08.22 13:54수정 2016.08.2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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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르미 그린 달빛>의 효명세자(박보검 분).
<구르미 그린 달빛>의 효명세자(박보검 분). KBS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선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조금 더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그가 눈을 감으면서, 함께했던 정치세력도 덩달아 무너진 결과였다. 그 후 70여 년 뒤부터 조선은 외국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결국 왕조의 문을 닫고 말았다.

정조가 떠난 뒤로 무능한 군주들이 뒤를 이었다. 순조·헌종·철종이 특히 그랬다. 이 세 사람이 왕위에 있었던 기간은 1863년까지 총 63년간이다. 서양열강이 시장개방을 목적으로 동아시아를 한창 공략하던 때였다.

184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제1차 아편전쟁을 벌여 청나라 시장을 개방시키고, 54년에는 미국이 일본 시장을 개방시키고, 56년에는 영국·프랑스가 제2차 아편전쟁을 벌여 청나라 시장을 추가 개방시켰다. 이 기간에 서양은 청나라·일본 공략에 치중하느라 조선에 대해서는 본격적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이렇게 서양이 청나라·일본의 문호를 쾅쾅 두드리던 때, 조선에서는 정조 사후에 약체 군주들이 연이어 셋이나 등장했다. 그래서 조선은 서양의 공격이 청나라·일본에 치중된 그 시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이때는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이때라도 조선이 제대로 대비했다면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은 1854년에 미국이 가하는 강타를 맞고도(미국의 강요에 의한 화친조약 체결과 시장개방)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기운을 추스른 뒤, 1870년대부터 서양열강의 대열에 끼여 동아시아 침략에 합세했다. 조선은 청나라·일본이 서양열강한테 당하는 19세기 초중반에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었다. 그래서 1875년부터 서양열강도 아닌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다. 19세기 초중반에 무능한 군주가 셋이나 등장하여 국력을 약화시키고 기회를 놓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순조·헌종·철종이 왕위에 있었던 그 63년 동안에, 조선을 바꿔보려고 의욕을 발휘한 지도자가 있었다. 왕의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와 맞먹는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만약 이런 지도자를 중심으로 조선 사회가 세계 흐름에 대응했다면, 조선의 역사는 충분히 바뀔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집권 3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다. 22일부터 방송되는 KBS 월화 미니시리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주인공이 바로 효명세자 이영(박보검 분)이다.


효명세자는 정조가 떠난 지 9년 뒤인 1809년에 태어났다. 순원왕후 김씨와 순조 임금 사이의 독자이자 장남이었다. 네 살 때인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열아홉 살 때인 1827년부터 임금 직무대행 즉 대리청정을 집행했다.

 아편전쟁. 중국 광동(광둥)성 동완시에 있는 해전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아편전쟁. 중국 광동(광둥)성 동완시에 있는 해전박물관에서 찍은 사진.김종성

효명세자가 태어나고, 세자가 되고, 대리청정을 시작한 시점들은 제1차 아편전쟁 이전이었다. 아직은 서양열강이 청나라가 정한 무역 규칙을 준수하면서 청나라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던 때였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위상이 여전히 상당할 때였다. 이런 시점에서 효명세자가 역사무대에 데뷔했던 것이다.


효명세자는 상당히 성실한 청년 지도자였다. 그가 죽은 뒤에 기록된 묘지문에도 그 점이 나타난다. 이 묘지문은 음력으로 순조 30년 7월 15일자(양력 1830년 9월 1일자) <순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묘지문에 따르면, 효명세자는 스무 살 전후의 그 시기를 잠자고 식사할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살면서 대리청정 직분을 열심히 수행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서 보고되는 재판문서나 상소문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 꼼꼼히 처결할 정도로 일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는 성실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도전적이기까지 한 청년이었다. 당시 조선은 형식상은 전주 이씨의 나라지만 실제로는 안동 김씨의 나라였다. 세자의 외갓집인 안동 김씨 가문이 신하의 직분을 넘어 정권을 독점하던 때였다.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의 독점체제에도 용감하게 도전했다. 대리청정 기간에 그가 역점을 둔 것 중 하나는 안동 김씨들을 요직에서 축출하는 것이었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개시한 날은 죽기 3년 반 전인 순조 27년 2월 18일(1827년 3월 15일)이다. 사흘 만인 2월 21일, 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놓았다. 대리청정을 개시한 기념으로 종묘 등을 둘러볼 때 의례상의 착오를 저질렀다 하여 이조판서 김이교에게 감봉 조치를 내린 것이다.

언뜻 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1764년에 출생한 김이교는 당시 64세로서 안동 김씨 가문의 핵심 인사였다. 안동 김씨가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제 막 대리청정을 시작한 열아홉 살짜리 세자가 그 가문의 거물급 인사를 징계함으로써 안동 김씨에 대해 경고의 신호를 보냈던 것이다. 안동 김씨에 대한 효명세자의 공격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안동 김씨의 독점체제가 와해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에 안동 김씨를 계속 압박함으로써 이 가문의 독점체제에 어느 정도 생채기를 내는 데 성공했다. 

 효명세자의 무덤인 수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에 있다.
효명세자의 무덤인 수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의 동구릉에 있다. 김종성

효명세자는 성실하면서도 도전적이었다. 두 가지 특성 중에서 성실함은 할아버지 정조를 연상케 했다. 정조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업무처리와 독서로 눈코 뜰 새 없이 살았다. 다른 군주들도 다 그렇게 했지만, 정조는 유별나게 심한 편이었다. 마치 '일중독'에라도 걸린 사람 같았다. 효명세자의 성실성은 그런 정조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효명세자는 '절반은 정조'였다.

반면에 도전적인 특성은 다분히 증조부인 사도세자를 연상케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정조를 닮지 않고 사도세자를 닮았다.

정조가 추진한 탕평정치는 특정 당파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 군주가 그 위에서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탕평이 추진되는 속에서도 기득권 보수정당인 노론당의 우위는 깨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조는 노론당을 크게 자극하지 않았다. 탕평을 추진하되 기득권층을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조심스레 행동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노론당의 독점체제에 대해 상당히 도전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는 세자 시절인 열 살 때부터 노론당의 잘못을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노론당을 비호하는 자기 아버지 영조까지 비판했다. 대리청정을 개시하자마자 안동 김씨를 자극한 효명세자의 도전성은 그래서 사도세자를 닮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효명세자는 '절반은 사도세자'였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하늘을 찌를 만한 능력을 겸비하지 못하면 별다른 소용이 없다. 사도세자처럼 효명세자의 경우도 그랬다. 대리청정 3년 반 동안 안동 김씨 독점체제를 깨뜨리고자 밤잠을 아끼며 살았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대리청정 기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사도세자는 도전적인 사람이지만, 성실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이성에 대한 관심을 조절하지 못해 인생의 상당부분을 거기에 허비했고, 이 때문에 도덕성 시비를 자초하고 말았다. 공격의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그는 결국 뒤주에 갇혀 죽는 참극을 당했다. 개혁의 선봉에 선 사람에게 명확한 도덕적 하자가 있었기 때문에, 개혁 저항세력이 이렇게 공개적이고 모욕적이고 처절한 방법으로 복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효명세자는 도전적이면서도 성실했다. 성실했기 때문에, 사도세자처럼 약점 잡힐 것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막강한 정치세력에 도전했으면서도 사도세자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지는 않았다. 개혁 저항세력이 공개적이고 모욕적이고 처절한 복수를 할 만한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절반만 사도세자'였기에 참극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효명세자는 그저 갑자기 죽었을 뿐이다.

만약 효명세자가 개혁 의지에 더해 개혁 역량까지 갖추었다면 어땠을까? 의지와 능력을 겸비한 상태에서 대리청정에 이어 임금 자리에까지 즉위해 뜻을 펼쳤다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마 적지 않게 변했을 것이다.

효명세자가 개혁세력의 지원을 받아 '안동 김씨의 나라'가 아니라 '모든 조선인의 나라'를 세웠다면, 조선은 '헬조선'이 아니라 신조선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184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서양의 공격 속에서도 조선은 좀더 색다른 제3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 효명세자가 스물두 살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물론 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효명세자가 어떻게 그려질지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구르미 그린 달빛 #효명세자 #세도 정치 #안동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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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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