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묘에 있는 공민왕 신당의 내부 모습. 그림 속의 두 인물은 공민왕의 부인인 노국대장공주와 공민왕 본인이다.
김종성
그런 조일신에 대해 세상이 불만을 품었다. 왕도 아닌 인물이 왕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직권도 남용하고 비리도 저지르고 부정축재도 저지르니, 세상 사람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래서 그를 탄핵하자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조일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의 비판에 대해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공민왕은 즉위 초만 해도 그를 처벌하기 힘들었다. 좀전에 소개한 그런 이유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일신을 처벌하라는 목소리는 끊임 없었지만, 조일신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일신은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사정기관에서 자신의 불법행위를 탄핵하자, 그는 자기 잘못을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큰소리를 뻥뻥 쳐댔다. 사정기관의 조사 요구에 불응할 뿐만 아니라 '담당자가 누군지 만나보고 싶다'는 식의 태도까지 보였을 정도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사건을 유야무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뿐 아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감찰관들이 조일신의 죄를 규탄했다. 이들이 공권력을 동원해 그를 코너로 몰려고 하자, 조일신 역시 공권력을 동원해서 그들을 무력화시켰다. 조일신 열전에 따르면, 조일신은 국법 집행을 방해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감찰관들에게 죄를 씌우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이를 갈고 미워했다"고 조일신 열전은 말한다.
조일신이 공권력을 조롱하며 자신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뻔뻔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공민왕의 무능 때문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공민왕은 큰 뜻을 품은 개혁군주였지만, 집권 초기만 해도 조일신 같은 비리 측근한테 휘둘리는 무능한 군주였다. 그래서 세상의 분노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리 측근을 사법 당국에 내주지 못했던 것이다.
비리 측근을 옹호한 대가로 공민왕은 결국 대가를 치렀다. 아니, 치러야 했다. 대가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조일신의 쿠데타였다. 세상 모르고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던 조일신은 급기야 '성역'까지 건드렸다. 공민왕을 상대로 쿠데타까지 감행한 것이다.
<대학>에 대한 주자의 해설에 따르면, 은나라 시조인 탕왕은 '일일신 우일신'이 포함된 문장을 자기 욕조에 새겨두고 매일 같이 마음의 때를 씻어냈다고 한다. 탕왕은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나날이 새롭게 했다.
조일신도 나날이 새로워졌다. 그의 나날이 새로워짐은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이었다. 직권남용과 비리가 나날이 새로워지더니 결국에는 자기 주군한테까지 반기를 드는 지경으로 발전한 것이다.
쿠데타 성공 직후에 조일신이 벌인 행위 중 하나가 조일신 열전에 소개돼 있다. 정권을 잡은 그는 독단적으로 인사 명령서를 작성한 뒤, 공민왕의 직인(어보·어새)을 빼앗아 마음대로 찍어버렸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 장군은 자신의 쿠데타에 대해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해줄 때까지 기다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불법적 압박을 가하고 하극상을 범했지만, 그래도 대통령의 손으로 재가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조일신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공민왕한테 재가를 강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직인을 찍어버린 것이다. 조일신을 비호해준 대가로 공민왕은 그런 치욕까지 당해야 했다.
조일신의 쿠데타는 오래가지 못했다. 쿠데타 뒤에 그는 권력 분산을 우려해 쿠데타 동지들을 직접 숙청해버렸다. 이 때문에 조일신의 조직력이 약해지자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민왕이 반격을 가했다. 조일신은 그렇게 해서 겨우 제거되었다. 권력과 부패의 극대화를 꿈꾼 조일신의 탐욕이 스스로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처음에 조일신의 비리문제가 불거졌을 때, 공민왕이 그를 신속하게 사법 당국에 내주었다면 공민왕의 체면 손상이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다. 비리 측근을 처벌하지 못하고 방치한 결과로 쿠데타까지 당하는 욕을 보았으니, 공민왕 입장에서는 조일신을 제거한 일이 별로 자랑스러울 수도 없었다. 그렇게라도 조일신을 없앤 것은 다행이지만, 그로 인해 공민왕도 적지 않은 체면 손상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이 겨우 수습된 때가 공민왕 취임 이듬해인 1352년이다.
조일신이 사라진 뒤에야 공민왕은 제대로 된 개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민왕의 위대한 개혁들은 조일신이 제거된 뒤에 나온 것들이다. 조일신이라는 허물을 벗어던진 뒤에야 진정한 개혁군주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군주가 아무리 훌륭하고 유능하더라도, 조일신 같은 비리 측근을 두고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취임 직후 한동안 조일신한테 휘둘린 공민왕은 그 점을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몸으로 체득했기에, 조일신 제거 뒤에 개혁군주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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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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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직권남용, 왕은 왜 그를 어쩌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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