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맨날 져운이 좋은 날이 없어
이희동
그렇게 아이를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회사 가는 길, 헛웃음이 터졌다. 내가 평소에 얼마나 언어생활을 험하게 했으면 '좋은 날이'를 '존나리'로 들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이야 6살 아이가 그 뜻을 몰라서 그냥 넘어가는 거지만 아이가 그 뜻을 알았더라면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아이들의 언어습관 형성에 있어서 부모의 영향이 매우 클 텐데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되는 거지? 아니, 내가 가르친다고 아이의 언어습관이 달라지기는 하는 걸까?
욕은 카타르시스다사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 나는 언어생활에 있어서 욕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는 결국 어렸을 때의 경험 때문이었는데, 나는 욕이 거의 없는 가정에서 자란 탓에 욕을 잘 하지 못했고, 그만큼 자라면서 여러모로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물론 부모님이야 자식들 앞에서 욕을 하지 않기 위해 더더욱 조심하셨을 테지만, 내게는 그 배려가 답답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우선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있어서 마음 한 구석 항상 찝찝함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 당시 또래의 말이라곤 절반이 욕이기 마련인데, 어렸을 때부터 욕을 터부시하고 자랐으니 친구들과의 의사소통이 어딘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누르고 있는, 바르고 고운 말만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 가끔 모범생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더더욱 심하게 욕을 해보지만, 그것은 역시 나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 흉내가 왜 그리 어색하고 내 스스로가 바보 같던지.
게다가 남자들끼리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욕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약점이었다.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세인데, 대부분 그 기세는 상대방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걸쭉한 욕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소위 '싸움은 선빵'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적절한 욕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싸움을 하는데 있어서 마이너스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욕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의 X같은 기분을 상대방에게 분명히 전달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욕만큼 자신의 불쾌함을 표시하는데 있어서 가장 간결하고 명확한 수단이 또 있을까. 물론 혹자들은 욕을 추임새처럼 쓰기도 하지만 제대로 된 욕은 상대방의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가장 큰 효과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욕에 대한 터부는 스스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었다. 욕은 혹자들에게 자기표현의 가장 강렬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혹자들은 욕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욕을 통해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욕은 때때로 자신이 가장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저항의 수단이기도 하며, 실낱같은 희망에 대한 강렬한 믿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