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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 교수는 싱어가 만에 하나 식물이 고통을 느껴도 (인간이 생존에 필요한 영양분을 필수적으로 섭취하지 않으면 훨씬 큰 고통을 겪으므로) 채식을 허용할 탈출구를 남겨뒀지만, 이것은 2차적 조치일 뿐 애초에 식물도 의식과 도덕적 지위가 있는지 고려했어야 했다고 지적한다. 또한 싱어는 인간과 동물의 행동이 유사하다는데 주목하지만 동물의 의식과 인간의 의식과 동등하게 비교하기가 어렵다는 지적을 하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가령, 원숭이들의 의사소통은 겉보기에 인간과 비슷하지만 실은 인간처럼 상대에게 생각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 생각을 드러내는데 그친다.(맹주만, 2009:252~254) 조심스러운 문제지만, 동물이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건 인간의 편견일 가능성도 아예 없진 않다. 한편 식물도 의식이 있을 가능성, 무언가를 느낄 가능성은 없을까?(필자)
맹 교수는 인간은 하등 동물에 비해 감각 기능이 다양하게 분화된 동시에(통각은 이중 하나일 뿐이다) 중앙 집중적 신경 체계로 통합돼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물들의 먹이사냥에서의 민첩함, 예민함, 과단성 등을 보면 동물이 인간보다 더 우월하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고, 심지어 식물이 더 우월하다고 볼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가령 식물은 굳이 움직이지도 따로 음식물을 소화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땅에 뿌리를 박고 삼투압을 이용해 자신이 융해할 수 있는 영양분만 선별해 섭취하니 오히려 운동으로부터 해방됐고 훨씬 효율적이라 볼 수도 있다. 또한 빛에 반응하고(굴광성) 중력에 반응하며(굴중성) 단단한 물체에 반응한다(굴촉성). 심지어 잎을 오므려 곤충을 잡아먹는 경우도 있다. 식물도 이처럼 감각을 갖는다면 의식적 존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사 동물과 같은 고통을 느끼지는 못 한다 해도.(맹주만, 2009:264~267) 그럼 다양한 감각 중 하필 고통을 도덕의 잣대로 봐야 할 이유는 뭘까. 인간, 동물, 식물 각각에게 고통은 어떤 의미일까. 싱어는 의식의 존재를 생명이 도덕적 지위를 얻기 위한 필수 전제 조건으로 들고 채식은 정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싱어와 같은 전제에서 출발해도 이와 모순되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맹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필자)
"싱어는 식물의 감각을 배제하는 고통 중심의 도덕적 기준을 포기하거나 식물도 도덕적 고려에 포함시키는 새로운 감각 중심의 도덕적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중략) 만일 식물이 감각을 지닌 의식적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의식이 갖는 어떤 능력의 차이를 식물을 차별하는 정당한 근거로 삼을 경우, 동일한 이유에서 인간과 동물의 의식의 어떤 차이를 근거로 양자를 차별하는 것 또한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맹주만, 2009:267~269)
"식물과 무척추동물은 자신이 받는 영향을 신경 쓰지 못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