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함께한 그리운 친구여

7학년 2반 학생들의 1박 2일 수학여행(1)

등록 2016.09.24 17:26수정 2016.10.0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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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소공원에서 만난 7학년 2반 친구들(왼쪽부터 임봉재, 박도, 이창묵, 이상길, 신길순. 2016. 9. 23.)
설악산 소공원에서 만난 7학년 2반 친구들(왼쪽부터 임봉재, 박도, 이창묵, 이상길, 신길순. 2016. 9. 23.)신길순

낙화(落花)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落花)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
- 이형기 '낙화(落花)'

내가 자주 애송하는 시다. '지금은 가야할 때'이지만 사람의 수명은 들쭉날쭉 제 각각이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것이다. 이 대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누구나 예외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참 공평하다.

지난해 나는 한 친구를 잃었다. 그의 빈소에 달려가 '애고 애고' 통곡했으나 고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날 빈소에 모인 친구들과 나눈 대화의 결론이다.


"이나마 건강할 때 자주 만나 밥과 술잔을 나누며, 남은 인생을 외롭지 않게 보내자."

'7학년 2반' 수학여행


이 말이 구체화된 것은 지난 5월 은사 조지훈 선생의 생가인 경북 영양 주실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민병기(창원대 명예교수) 친구와 즉석에서 결정한 후 달리는 시외버스 안에서 몇 친구에게 수학여행을 떠나자고 제안을 하자 모두 흔쾌히 수락했다. 

[관련 기사] 스승 조지훈 기일, 친구와 떠난 즉석 여행

그날 전화통화에서 한 친구(이창묵)는 큰 수술(대장암) 후유증으로 요양 중이라 가을로 미루기에 그의 의사를 따랐다. 또 한 친구는 좋은 기획이라고 말하면서 이 기회에 더 크게 확대하자고 했으나 우선 차 한 대 정도의 몇 사람만 조촐히 여행을 떠난 뒤 거기서 의논하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 전화가 오가는 중에 유언무언으로 내가 7학년 2반(72세란 뜻) 임시반장을 맡게 되었다.  

몇 친구와 상의한 결과 수학여행 날짜는 추석 1주일 후인 9월 21~22일로 잡았다. 거기에는 요양 중인 친구를 배려함이었다. 그런 뒤 곧장 나는 평소 자주 갔던 남설악의 한 숙소에 예약을 한 뒤 친구들에게 중간 중간 안부 문자나 전화를 하면서 건강에 유념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친구들도 모두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답신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한 친구가 추석에 해외에 사는 아들이 손자를 데리고 귀국하기에 시간을 낼 수 없다는 메일을 받고 매우 아쉬웠다. 마침 같이 고교 교단에서 섰던 신길순(전 동북고 교감) 친구에게 동참을 권유하자 그 즉석에서 'OK' 사인을 보냈다.

나는 수학여행 날을 한 달 앞두고 여행 세부 코스와 매끼 메뉴까지 정한 뒤 문자로 보냈다. 그러자 모두들 적극 찬동하여 전원 참석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또 돌발변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로 친구들에게 또 건강 기원 문자를 보냈다.

그런 확인 과정에서 중앙농원 임봉재 대표가 다른 행사와 날짜가 겹친다면서 하루 연기를 청하기에 친구들에게 통보하여 승낙을 얻은 뒤 9월 22~23일로 최종 날짜를 정했다. 그러면서 내심으로는 이번 수학여행이 무산되면 나 혼자라도 떠난다고 작정했다.

 한계령 정상에서(오른쪽부터 이상길, 신길순, 임봉재, 박도)
한계령 정상에서(오른쪽부터 이상길, 신길순, 임봉재, 박도)이창묵

늙은 남자의 행복 조건

출발 이틀을 앞두고, 전날에도 문자로 확인한 결과, 모두 참석하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내가 극성스럽게 독려를 한 까닭은 대학 졸업 후 처음 떠나는 1박 2일의 수학여행으로, 친구들이 서울, 대구, 용인, 양평, 원주 등지에서 흩어져 사는 데다가 일흔을 넘긴 나이, 그리고 건강 문제, 가정사 등 여러 가지로 돌발변수들이 많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2016년 9월 22일 12시 정각에 강원도 여행에 교통 요지인 원주시외버스터미널 대합실 TV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데다가 임시반장이기에 그날 아침 약속시간 30분 전에 약속장소로 갔더니 임봉재 중앙농원 대표가 부인의 애마를 몰고 가장 먼저 나타났다. 이어서 대구에서 이상길 대표(대동가방상사)가 시외버스로 도착했다. 곧 이어 서울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온 이창묵 이사(전 선경, 유원건설)가 손을 번쩍 치켜들면서 나타났다.

곧 이어 양평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온 신길순 친구가 마지막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들은 서로 얼싸 안고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면서 우정을 확인했다. 우리들은 곧장 스케줄에 따라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오대산으로 달렸다.

한 친구는 늦은 점심으로 시장할 것 같아 부인이 마련한 약밥을 싸왔고, 또 한 친구는 앞으로 계속 건강생활을 하라고 만보기를, 또 한 친구는 자기 집 밤나무에서 수확한 햇밤과 음료수 등 여러 가지 선물을 쇼핑백에 가득 담아왔다.  

가을볕이 좋은, 가을이 곱게, 아주 멋들어지게 잘 익어가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다섯 친구들은 차중 한담을 즐겼다. 모두들 일흔 노인들이라 우리의 화제는 자연히 '꼰대 이야기'였다. 늙은 남자의 행복 조건 네 가지 얘기로, 첫째 부인이 있을 것, 둘째 적당한 돈이 있을 것, 셋째 친구가 있을 것, 넷째 건강 등이라는 말에 모두 공감했다. 하지만 늙은 여자의 행복 조건 네 가지에는 첫째 남편이 없을 것이라는 말에 차중 친구들은 한동안 씁쓸히 웃었다. 그밖에 조건은 남녀가 동일하단다.

차중 친구들은 이번 1박 2일 수학여행을 떠남에 부인들은 아예 며칠 더 머물고 오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올해 99세의 노모를 모시고 산다는 신길순 친구는 늙으신 어머니가 아들이 하루라도 당신 곁을 떠나는 게 싫어하는 눈치를 보였다는 그 말에 숙연해졌다.  

카메라 메모리 칩을 빠트리다

우리 7학년 2반 다섯 친구들은 1965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입학 동기생들이다. 이 가운데 세 친구(임봉재, 이상길, 박도)는 학훈단 후보생이었고, 이창묵 친구는 재학중 고대신문사 기자로 활동했기에 넷은 1969년에 함께 졸업했고, 신길순 친구는 1학년 수료 후 군에 입대하여 복학한 뒤 3년 후인 1973년에 졸업했다. 각기 병역을 마친 후 두 친구(신․박)는 학교에서, 세 친구는 산업현장에서 뛰면서 모두들 열심히 살았다.

우리는 오대산 들머리 보배식당 할머니의 반가운 영접을 받았다. 두 내외가 손수 마련한 산채나물 정식과 비빔밥으로 시장기를 메운 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대산 월정사 천년의 숲길을 산책했다. 나는 그 길에 매우 익었지만, 그날따라 친구들과 걷는 발걸음은 한결 사뿐했다.

나는 이번 역사적인 수학여행을 기획하면서 미리 챙긴 것 중의 하나가 카메라였다. 내 카메라는 2004년 백범암살진상 규명차 미국방문을 앞두고 큰돈을 들여 마련한 것으로 그동안 잘 써오다가 최근에는 책장에 고이 보관한 채 거의 사용치 않았다. 그래서 전날 밤 카메라를 꺼내 배터리를 충전시키고 메모리 칩에 저장된 이미지를 지우는 등 이번 수학여행 행사의 전 과정을 잘 찍은 뒤 친구들에게 내 솜씨를 뽑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월정사 어귀 돌다리 위에서 기념촬영을 하려는데 초점이 맞춰지지 않아 메모리 칩을 열자 그때서야 칩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순간 낙담과 함께 '이제 나도 별 수 없이 늙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자 친구들이 나를 위로하면서 자기들 스마트폰을 꺼냈다.

"자네가 이번 수학여행 반장으로 여러 가지를 챙기다 보니 그런 모양이네."

우리는 거기서 멋지고 한적한 지름길로 진고개 정상에 올라 20전 대보탕(주인이 20가지의 영약을 넣어 끓였다 함)을 한 컵씩 마신 뒤 동해바다로 달렸다. 현남 IC를 지나자 마침내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그리운 '친구여'

임봉재 친구 부인 애마는 푸른 동해바다를 끼고 양양에 이른 후 죄회전하여 한계령으로 달렸다. 핸들을 잡고 있는 임봉재 친구는 전직이 나무장사꾼이라 전국 구석구석 다니지 않은 곳이 없기에 모르는 곳이 없었다. 그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한계령 정상 부근의 필레게르마늄 온천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오색에서 온천하기로 스케줄에 있지만 이틀 거푸 하는 것도 좋은 듯 한데다가 모두들 가보지 못한 곳이라 그의 안내에 찬동했다. 하기는 그가 핸들을 잡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기사 맘대로'일 수밖에 없었다.

한계령에서 만학천봉을 굽어살핀 뒤 친구가 안내하는 천년비경의 골짜기를 사뿐히 달려 갔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 아닌 탓으로 필레게르마늄 온천장은 보수 중이라 눈 구경만 하고 돌아섰다. 한 친구가 덕담을 했다.

"말표(임봉재 친구의 별명), 자네가 우리를 이곳으로 다시 안내하라고 오늘 쉬는 모양이네."

그 온천 옆 필레식당에서 송어매운탕으로 만찬 건배사를 하면서 그 진미를 오감으로 맛보았다. 

거기서 차머리를 다시 돌려 오색약수 숙소로 갔다. 체크인 한 뒤 거실에 이르자 이상길 친구가 오카리나 악기를 꺼낸 뒤 '친구여'를 연주하며 그동안 배운 솜씨를 뽑냈다.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옛일 생각이 날 때마다
우리 잃어버린 정 찾아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조용히 눈을 감네

슬픔도 기쁨도 외로움도 함께 했지
부푼 꿈을 안고 내일을 다짐하던
우리 굳센 약속 어디에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따라 흐르고
친구여 모습은 어딜 갔나
그리운 친구여

 한계령 필레약수터 필레식당에서 만찬을 나누다(오른쪽부터 이상길, 신길순, 이창묵, 임봉재, 박도)
한계령 필레약수터 필레식당에서 만찬을 나누다(오른쪽부터 이상길, 신길순, 이창묵, 임봉재, 박도)신길순

친구 따라 천당도 가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
"금을 팔아 친구를 산다"
"친구 없이 살기보다는 죽는 편이 낫다"
"친구는 옛 친구가 좋고, 옷은 새 옷이 좋다"
"유쾌한 길벗은 마차처럼 좋다"
"벗은 기쁨을 두 배로 하고, 슬픔을 반으로 나눈다" 

우정에 관한 동서고금의 속담, 격언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나는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우정의 중요성을 얘기할 때, 우스갯소리로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은 이제는 구닥다리다. 요즘은 강남은 지하철 한 번만 타면 간다(속담에 등장하는 강남은 서울의 강남이 아니지만). 그래서 "친구 따라 천당도 가고, 지옥도 간다"로 고쳐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다. 이는 친구 따라 교회나 성당, 절로 갈 수도 있고, 또는 친구 때문에 마약중독자나 알코올중독자도 될 수 있고, 혹은 친구 따라 디스코 장에 가서 불에 타죽는 일도 일어났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오늘까지 살아오는 데는 친구들의 도움이 매우 컸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려운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젊은 날 객기로 서울 용산구 오산중학교에서 교사로 잘 다니다가 모교인 중동고등학교 교사로 갔다. 모교에서 1년을 간신히 버티다가 학기 초 전임 오산중학교로 다시 갔다.

그러자 모교에서는 학교 이동에 따른 동의서를 발급해 주지 않는 등 하필이면 모교 출신이 전임교로 갔다고 나의 처사를 대단히 불쾌히 여겼다. 또 다시 옮겨간 오산중학교에서는 일부 교사들이 자기 모교를 뛰쳐나와 하필이면 전임학교로 왔다는 조소 속에 지내는 게 젊은 나로서는 견딜 수 없었던 고통이었다. 그때 대학 동기 민병기 친구는 그런 나를 별나고 모난 사람으로 비난치 않고 제3의 학교로 가라고 충고해 주었다. 그 친구가 알선해 준 학교가 내가 마지막 봉직했던 학교로 28년간 근속했던 이대부고였다.

또 그해 나는 만혼으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처갓집이 대구라 이상길 친구가 함을 져 주고, 민병기 친구가 대구까지 내려와 결혼식 사회까지 맡아주었다.

나는 아주 일찍부터 작가의 꿈을 가지고 소설을 썼다. 그런데 등용문인 신춘문예에 스무 번 정도 떨어지는 등 각종 공모 때마다 낙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 쓰기를 포기하고 산문집을 펴냈다. 그러자 한승옥 친구가 내 산문집을 보고 일부러 신촌의 학교(이대부고) 앞으로 찾아와서 "자네의 문재가 아깝네. 뭐 소설이 별개냐. 산문을 좀 더 길게 쓰며 약간의 픽션만 가미하면 된다"고 잦아진 내 창작욕에 불을 지펴주었다.

[관련 기사] 내 영혼을 두들긴 말 "네 글 솜씨가 아까워"

그래서 쓴 작품이 나의 첫 작품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면 산다>였다. 그는 그 후에도 자기가 다니는 성당의 신부님에게 연결해줘 내가 펴낸 <영웅 안중근> 등 숱한 책 출판에 방 신부님이 화끈하게 후원해 주셨다. 그런 그 친구를 지난해 갑자기 잃고 빈소에 가서 통곡해 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야 말로 "죽은 자식 나이 세기"였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다음기사 : 극락서 보낸 1박2일, 72세의 수학여행 끝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분량이 많아 2회로 연재합니다.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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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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