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농민 장례식장에서유문철 씨는 유기농 햅쌀 1톤을 페이스북을 통해 판매해 500만원 전액을 백남기투쟁본부에 전달했다.
권말선
"오늘 기운을 차려 논밭을 둘러보았습니다. 제가 아홉 해 농사지으며 올해처럼 벼농사가 잘된 적이 없습니다. 쌀값 대폭락으로 농민들의 절규와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지만 어쨌든 황금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본능적으로 마음이 밝고 환해집니다."지난 10월 2일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에서 8일 만에 돌아온 젊은 농부 유문철씨는 많이 지친 모습이다. 도시에서 직장 다니다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가 아홉 해 째 유기농으로 농사를 짓는 그는 최대 풍작을 이룬 유기농 논에 서서 황금들녘을 바라본다.
이웃 농민들이 폭락한 쌀값에 대한 한숨 내쉬는 걸 동병상련하는 그다. 그럼에도 근심은 뒤로 하고 그저 풍년든 황금들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진다. 그런데 황금들녘을 바라보는 그에게는 특별한 다른 생각이 있었다.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던 날 농사일을 멈추고 서울대 장례식장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8일간 노숙하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경찰의 부검시도를 우려해 시신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농사를 짓는 입장에서 투쟁의 현장에 계속 있을 수 없어 그 속상함을 어떻게 풀까 고민했어요."그는 지난해 11월 물대포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민중총궐기에 함께 하지 못하고 백남기 농민의 죽음을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쌀, 고추, 마늘, 참깨 판 돈 1백만 원 들고 농성장을 찾았다.
그리고 겨우 내내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에서 노숙을 하며 농성장을 지켰다. 지난 1월말에도 백남기 농민 대책위 운영 기금 마련 쌀 판매해서 번 돈 60만 원 남짓도 투쟁기금으로 내놓았다. (관련 기사:
백남기 선생 쾌유 농성장에 백만 원 들고 갔습니다)
농사를 짓는 그가 현재 투쟁을 하는 현장이란 바로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이다. 대한민국에 살며 상식을 가진 대다수 사람들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농민들에게는 분노감과 한스러움이 훨씬 더하다. 경찰이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 조준살수한 것과 그로 인해 사경을 헤매게 되고 결국 죽음을 맞은 후 지금 검찰이 끊임없이 부검을 하겠다고 덤비는 모습을 차마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몸이 참여 못하면 농산물이라도 팔아서 투쟁기금으로 보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남기 농민이 칠십 평생 성자처럼 사시고 가시는 길에 꽃을 뿌려드리지 못하는 비참하고 참담한 상황에서 투쟁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체적 방법으로는 지난해 백남기 농민께서 쓰러지시기 전 밥쌀 수입 중단, 쌀값 21만 원 공약 이행을 외치던 상황과 백남기 농민께서 지으셨던 생명평화 농사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후배 농민이 생명평화 유기농 쌀농사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그는 결국 1000평에 달하는 유기농 논 두 다랑이의 절반에 달하는 500평에서 소출되는 유기농 햅쌀 1톤을 페이스북을 통해 판매해 그 대금 500만 원을 전액 투쟁기금으로 내놨다. 쌀 1톤은 1만 명이 밥 한 그릇씩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이 캠페인에 참여한 시민 83명이 모두 '내가 백남기다'라는 심정으로 힘을 보탰다. 관행농 햅쌀 가격이 16만 원 아래로 떨어지고 산지 가격이 10만 원대로 대폭락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유기농 햅쌀 40만 원 쌀값에도 판매개시 4시간 만에 매진될 정도로 시민들의 호응이 뜨거웠고 격려의 글이 밀려들었다.
문득 논밭 팔고 소 팔아 서울서 유학하는 자식 뒷바라지 하던 우리네 부모님 모습이 떠오른다. 타국에서 독립운동 하는 이들을 위해 자금을 마련하는 심정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자신이 한 해를 고스란히 바쳐 농사지은 쌀이며 농산물들을 팔아 투쟁기금을 보냈다. 물론 그 농산물에 담긴 의미에 공감하며 선뜻 마음을 내어 준 소비자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소비자의 신뢰를 얻기까지 젊은 농민은 9년의 유기농사의 어려움을 견뎌왔으리라.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