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나 낙태했어>
한국여성민우회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편견을 형성하고, 낙인을 찍은 후 근본적인 사회적 지위를 취약하게 만드는 방식. 이는 하나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가장 저열한 방식 중에 하나다. 당사자가 아무런 자기 변호도 할 수 없고, 임신 중절을 금지시키려는 주장이 '상식'과 '윤리'의 지위를 얻을수록 그 주장은 더욱 힘을 얻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는 지금까지 이루어져 온 여러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통제 방식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참으로 비극적이게도, 혐오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자신들의 목소리가 먹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 임신 중절 당사자들의 경험이 드러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이들이 통념과 전혀 다른 사람들이며, 임신 중단을 결정하는 과정 또한 편견과는 다름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당사자들에 대한 낙인과 꼬리표가 사라질 때,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오늘 소개할 책 <있잖아 나 낙태했어>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13년에 한국여성민우회가 발간한 이 책은 임신 중절을 경험한 25명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임신 중절'은 없다한 해, 약 20만 명이 임신 중절을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많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25명의 인터뷰이들은 다양한 연령, 직업, 사회적 위치 만큼이나 서로 다른 사연을 펼쳐 보인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천 명의 임신 중절 당사자가 있다면 천 개의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 중에서, 임신 중절을 둘러싼 편견과 겹쳐지는 이야기는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이들에게 임신 중절은 삶의 중요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 선택이 무책임이나 면피의 형식을 띠고 있지 않았다. 즉 편견처럼 임신 중절을 가벼운 선택지로 고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령 어떤 사람은 도저히 지금보다 더 많은 아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누군가는 아이를 낳고 양육을 할 준비가 되지 않아서, 혹은 몸이 감당할 수 없어서 임신 중절을 결정했다. 비혼모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임신을 중단한 사례도 있다.
어느 사연도 막상 들어보면 임신 중절이 손쉬운 선택이었다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이야기를 듣고 당사자의 입장에 서보면 그 결정은 불가피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는 형법이 낙태죄를 규정하고 있어도, 임신 중절이 계속 이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히려 임신 중절 처벌은 수술 비용과 위험이 더 높아지는 결과만 만들어 냈다.
편견이 아닌 삶의 이야기통념에 반대되는 것은 임신 중절을 결정한 이유 뿐만이 아니다. 인터뷰이들이 원치 않는 임신에 이르는 과정 역시도 사회적 편견과 배치되어 있다. 가령 누군가는 10대의 임신 중절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여고생들한테 물어봐요. 왜 남자 친구랑 그랬냐고. 그러면 남자 친구가 원해서 키스하다 보면 막 만지고 못하게 하면 계속 까칠하게 대놓고 욕하고 안 만나 주고 소문내고 이러니까 잤는데 콘돔하기 싫다고, 느낌 이상하다고 안 하려고 해서 낙태를 했다고 해요. 내가 먼저 콘돔하자고 하면 싸 보인다고 어디 여자가 뭐 그런 얘기 하냐고 그렇게 해서...'
이 인터뷰이가 말하는 것처럼 '멋모르게 쾌락에 의해서' 임신에 이르는 경우는 없다. 책이 인용한 논문이 언급하듯 '여성들이 '갑작스럽고, 강제적인 성관계'를 피임에 대한 고려도 없이 수용하게 만드는 구조'가 원치 않는 임신의 배경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책은 당사자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통해, 삶의 언어를 통해 임신 중절이란 무엇이고, 누가 하며, 어떻게 하게 되는지를 이야기 한다.
나는 누군가 임신 중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통념과 편견을 벗겨낸 이 책의 목소리들을 꼭 읽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마주하고, 그 삶을 들여다보고, 그 위치에 선 이후의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여전히 임신 중절을 처벌해야 하냐고 생각하냐고. 당신이 생각하는 임신 중절이 그 곳에 있었느냐고.
있잖아… 나, 낙태했어
사단법인 한국여성민우회 지음,
다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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