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가을 풍경
전새날
가을은 농부들의 희망이다. 수확을 한다는 심리적 기쁨도 있지만 실제로 지갑에 돈이 들어오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수확한 콩이 가을 초반부터 기분을 구겨 버렸다.
큰 태풍도 없었고 장마도 짧았던 올해는 대체로 풍년이다. 뜨겁고 맑은 날이 많았다 보니 고추도 병 없이 잘 붉었고 오미자, 사과, 배 등도 일부 농장의 돌풍과 무더위 피해 외에는 충실하게 익었다. 장마가 길고 기압이 낮으면 병해충이 기승을 부리지만 그 반대면 풍년이다. 희망에 부풀어야 하는 가을인 셈이다. 그러나 들녘의 풍년과 지갑의 풍년은 비례하지 않은지 오래다.
대대손손 가난하게 살았던 우리 농부들이 그래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배경은 가을걷이, 곧 '가실'이 있어서다. 봄이 다 가기도 전에 쌀이 떨어져 끼니가 어려워지면 어쩔 수 없이 몇 달만 빌리고도 두 배로 갚는 고리대 장래쌀을 내 먹을 때도 "가실에 보자"고 하면서 가을걷이를 담보물처럼 제시했다.
가을은 1년 동안 땀 흘린 농부들이 계산대 앞에 서는 때다. 가족노동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자급 농사가 주를 이뤘지만 그래도 농자재 대금이나 생활 잡비, 아이들 학비 등 여기저기 현금이 들어갈 데가 많은데 그때마다 땜질하듯이 메꿔 오면서 가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여긴다.
요즘은 수지가 맞든 안 맞든 농부들의 주 소득이 다양해져서 주곡에서 특용작물이나 과수, 축산, 잡곡 등으로 옮겨 갔지만 오랫동안 이 땅 가을걷이의 대명사는 쌀이었다. 쌀은 농가 경제의 주춧돌이었다. "생쌀 먹으면 니 에미 죽는다"는 말도 이래서 나왔을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쌀농사가 으뜸 공판장 면서기가 한쪽 면이 비스듬히 잘려 나가서 뾰족해진 기다란 쇠 대롱으로 나락 가마니를 푹 찔러서 나락을 반 줌 정도 꺼내서는 수분 측정기에 쏟아 넣고 수분부터 쟀었다. 수분 함량이 16% 이상 나오면 불합격이다. 다행히 수분 합격을 받고 나면 등급 판정 단계로 넘어간다.
나락 알곡이 얼마나 충실한지를 판정하는 순서다. 나락 매상 날 모습이다. 이론과 실기를 합격하고 면접관 앞에 서서 마지막 관문을 넘보는 수험생이라 할까. 공판장 면서기의 입놀림에 1년이 평가받는 순간이라 농부들은 바짝 긴장한다.
마당이나 도랑가에서 나락을 말려 가지고 매상 준비를 할 때는 살짝 모아 놓은 나락 위에 고무신을 신고 올라서서 한쪽 발뒤꿈치로 딛고 빙그르르 돌아 본다.
그래서 껍질이 거의 다 까지고 말간 쌀알이 나오면 비로소 가마니에 퍼 담아서 40kg 저울에 맞춰 공판장에 지고 간 것인데, 수분 함량이 안타깝게도 턱걸이를 못 하고 불합격하면 보름 뒤에나 있을 2차 매상 날을 기다리기에는 당장 오늘 공판장에서 돈을 나눠 줘야 할 빚쟁이들이 대기하고 있는지라 공판장 창고 뒷마당에 나락 가마니를 쏟아 놓고 부랴부랴 좀 더 말리는 법석을 떨기도 한다.
면서기가 "특등"이 아니라 "1등"이나 "2등"을 외치면 아수라장이 된다. 애원과 협박과 욕지거리가 난무한다. 100여 가마니 이상 매상하는 농부는 눈앞에서 돈다발이 날아가는 것이라 눈알이 돌아 버린다. 모든 나락 가마니가 특등을 받아 주막에서 호기 어린 객기까지 부리며 얼큰하게 취한 사람 앞에서 더욱 초라해진 농부는 그 때문에 술잔을 기울이기도 한다.
쌀 말고는 돈 되는 게 없던 시절이라 더 그랬다. 눈에 불을 켜고 매상 등급에 매달렸던 것이다. 몇 년 되지 않는다. 길어야 30여 년 전에 불과하다. 그 전의 우리 농촌 역사에서 쌀은 농가 소득의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들풀과 농사 부산물로 소 키우기 그래서 모든 농부는 물길을 끌 수만 있으면 산비탈도 개간해 논으로 만들었다. 물길을 끌 수 없으면 천수답을 할지언정 밭농사는 하지 않으려 했다. 쌀만큼 가을에 현금을 보장하는 작물이 없었다.
쌀금은 등락이 심하지도 않았다. 매상가를 정할 때도 생필품 가격 인상분이나 소비자 물가를 고려해서 그에 뒤지지 않게 책정했다. 정부의 수매가가 시장가를 형성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쌀값 안정성이 높았다. 2016년 올해의 쌀값이 24년 전과 똑같은 현상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옛날에는 식품 가공이 지금처럼 무분별하게 진행되지 않아서 쌀을 대체할 식품이 없었다. 쌀이 없으면 마지못해 먹는 것이 고구마였고 감자였고 밀가루 음식이었지, 쌀만 있다면 두말 않고 그런 것은 다 물리고 쌀밥을 해 먹었다.
나무를 해서 장에 내다 판다든가 산밤을 줍거나 도토리를 가지고 묵을 만들어 팔아 돈을 샀지만 용돈이나 마련하는 수준이었거나 농사가 없는 사람이 쌀 팔아 먹는 정도였다. 돈을 산다고 하는 것은 돈을 귀한 상품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흔한 농가 소득 중 하나는 소나 돼지 등 가축을 키워 새끼를 낳게 해 파는 것이었다. 소는 교배해서 열 달이면 새끼를 낳는데, 두 달만 지나도 다시 임신하기 때문에 1년에 새끼를 한 배씩 낳을 수 있어서 상당한 농가 소득이 되곤 했다. 돼지도 마찬가지다. 넉 달이면 새끼를 낳는데 한 번에 7~8마리에서 10마리까지도 낳는다.
요즘처럼 사료를 사서 가축을 키우는 게 아니라 들에 나는 풀이나 농사 부산물로 키웠다. 부엌에서 나오는 구정물과 방아 찧고 나오는 쌀겨로 키웠기 때문에 노동력만 좀 더 들 뿐이었다. 아이를 많이 낳았기 때문에 아이들도 소 한 마리 돼지 몇 마리는 거뜬히 키우는 식이었다.
농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나라에서는 뭘 했을까? 농외소득이니 복합영농이니 하면서 과수나무를 심게 하고 특용작물을 권해서 수매해 주는 정책은 1980년대 들어서나 본격화되었다. 밤나무와 사과나무, 대추나무 들을 밭에 심기 시작한 때다. 매실나무, 오미자나무, 차나무 등을 대대적으로 심은 것은 쌀밥을 대체하는 가공식품이나 육식이 급속도로 늘어나 서구식 식생활 양식이 확대되는 시점과도 일치한다.
대표적인 불상사는 전두환 정권 때 전두환의 친동생인 전경환이 소 파동을 일으킨 것이라 하겠다. 오스트레일리아산 소와 쇠고기를 대량으로 도입해 소값 파동을 일으켰으며, 병든 소까지 도입해 수천 마리가 죽고 빚더미에 올라선 농민들이 자살하는 등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종자개량과 농법 개발이 농부 손 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