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농민 농업회의소는 농민의 생계와 자존심을 지켜준다(진안마을주식회사에서).
정기석
WTO, 카길, 몬산토와 맞서 싸우는 농업회의소
한국 농부의 표준형은 '평균 농지 1.5ha에서 연간 1100만 원 밖에 못 버는' 소농, 가족농, 영세농들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경쟁 상대는 카길을 비롯한 5대 곡물메이저, 델몬트, 몬산토 등 가공할 다국적 농기업들이다. 이들 다국적 농기업(또는 글로벌 메이저)들은 WTO, FTA를 앞세우거나 등에 업고 농산물의 유통부터 가공은 물론, 생산기반마저 독점하고 있다. 세계농업 시장을, 생명산업을 구호이자 무기 삼아 칼처럼 휘두르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은 식량자급률 23%라는 절체절명의 국가적 위기상황에 직면해있다.
다국적 농기업이라는 거악은 지금도 세계농업을 독점하기 위해 농업개방을 압박하고 자국농업보호정책을 무력화시키는 데 혈안이 되어있다. 이에 맞서 EU는 그 대응전략이자 무기로 '직불금'이라는 혁신적인 카드를 꺼내들었다. 공공재로서 농업을 지키기 위해, 친환경 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 토양, 기후 등 환경을 보전하고 농촌의 전통, 문화, 경관을 보전하는 농업의 공익적 역할과 다원적 기능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부터 탄탄히 구축했다.
이때 직불금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전략은 바로 시행 주체가 누구인가에 달려있다. EU는 정부가 아니라 농업회의소를 직불금 제도의 시행주체로 결정했다. 겉으로는 정부와 협치(거버넌스)를 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속으로는 '자국농업 보호정책 및 지원에 대한 규제'라는 WTO의 감시와 시비를 피해가려는 고도의 전략적인 포석을 둔 것이다. UR과 WTO출범 이후에는 대외농정에 대응하는 자치 기능을 한층 강화하고 있다.
다국적 농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쌀값 등 자국 농민의 기본소득도 보전치 못하는 한국에 농업회의소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정 박사는 "현재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농민 단체, 연합체, 협의체 등은 임의기구로써 정책참여가 법적으로 보장될 수 없을뿐더러 앞으로는 운동적 대항과 저항방식으로는 문제해결이 어려워지는 사회"라고 조언한다.
유럽의 농업회의소도 산업혁명 이후 농업 위축에 반발한 농민운동, 민주화운동의 성과물로서, 법적, 제도적 농정참여기구이다. 정 박사는 부디 "농업회의소 설립에 부정적이거나 비협조적인 정부와 기업, 농협중앙회 등의 방해도 이겨내 농업예산과 농업기관과 농지를 지키기 위해서 농업회의소를 반드시 설립하자"고 호소한다. 농민들이 조용히, 고분고분, 가만히 있으면, 다국적 농기업의 무차별적인 공세에 맞서 싸울 수 없다. 농업회의소 설립은 고사하고, 농민의 기본 생계와 최소한의 자존심조차 지킬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