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역날 직장이 결정되다... "지방이라도 가겠습니까"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제2부 교단일기 (1)

등록 2016.11.07 09:48수정 2016.11.0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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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제2부 교단일기를 시작하면서
내가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쓴 때는 2002년 7월 8일이었다. 그후 14년간 시민기자로 오늘까지 쓴 기사는 1300여 꼭지가 된다. 그 가운데 교육에 관한 기사는 몇 꼭지 되지 않는다. 내 인생에 교단생활은 황금기인 20대 후반부터 60대까지 33년의 세월로 그 얘기들은 지천으로 많았지만 교육, 특히 학교 현장 얘기를 삼갔던 것은 '너는 그때 뭐 했느냐?' '너는 그러지 않았느냐?'라는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새는 깃털을 남기지 않고, 아름다운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침묵이 미덕인 줄 알지만, 모두가 침묵해 버리면 그 사회의 발전은 이뤄질 수 없다. 이제 내 인생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한 평범한 교사의 지난 교단일기가 뒷사람 삶에 참고가 되거나 우리 교육 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기를 바라면서 제2부 교단일기를 시작한다.

등장인물은 가능한 실명으로 쓰겠지만 부득이한 경우는 직명 또는 아무개나 가명으로 쓰겠다. 이 글에 나오는 인물들은 나와 같은 필부들로 다만 내가 그때 그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에 등장시킬 뿐이다. 아무쪼록 이 연재가 순항할 수 있도록 많은 성원과 격려, 채찍을 바란다.


교사로서 마지막 날 일기


2004년 2월 29일.

오늘은 예년과는 달리 4년마다 덤으로 생긴 날이다. 그런데 나는 한국에 있다면 집에서 쉬고 있을 테지만, 지금은 미국 메릴랜드 주 로렐(Laurel)의 베스트 웨스턴(Best Western)이라는 숙소에 머물면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출근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튼 이 날은 나에게 교사로서 마지막 날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1971년 7월 12일 교단에 선 이래, 꼭 32년 7개월 18일 만에 교단을 떠나는 셈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난 내 생애의 대부분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냈다. 1952년 4월 구미초등학교(당시는 구미국민학교)에 입학한 후, 구미중학교, 중동고등학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기까지 17년(고교 4년) 동안은 배우는 처지로 학교에 다녔고, 그 후 2년 4개월의 군복무를 마친 후 열흘 만에 교단에 섰다. 교단에 선 이래 오늘까지 가르치는 신분으로 학교에 다녔으니 반백년의 세월이다.

이제 정년을 5년 앞두고, 내 자의로 학교를 떠나는 마음은 매우 착잡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담담하다. 지난 교단생활을 돌이키면 참 잘 버텨왔다는 안도감과 교사로서 직분을 다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이 반반이다.

지금 내 머리에는 수많은 제자들의 얼굴이 스쳐간다. 교사로서 첫 담임을 맡았던 1972년 3월 1일을 잊을 수 없다. 오산중학교에서는 그날이 공휴일임에도 교주 남강 이승훈의 독립정신을 기리고자 유독 3.1절 기념식과 아울러 개학식 입학식을 모두 치렀는데, 그날 나는 1학년 12반 담임교사로 반 학생들과 처음으로 상견례를 했다.


꽃샘추위로 쌀쌀한 날씨이지만, 운동장에는 새 교복을 입은 신입생과 학부모님들로 가득 찼다. 12반 팻말 앞에 2열로 늘어선 신입생들이 너무 귀엽고 예뻐서 한 녀석 한 녀석 껴안아주고 쓰다듬어줬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도 낮에 본 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개학 후 곧 신입생 학급대항 축구전의 막이 올랐다. 내가 총감독이 돼 선수선발에서 경기 중 작전지시까지 내렸다. 마침내 우리 반이 12반 중 감격의 우승을 누렸다. 우승의 순간 고사리들이 달려들어서 헹가래를 쳐주었다.


나는 그들과 계속 진급하면서 3년을 보내고 꼭 서고 싶었던 모교 중동고교로 갔다. 하지만 1년 만에 다시 오산중학교로 돌아왔다.

그때의 얘기는 애써 잊어버리고 싶다. 언젠가 학교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쓸 기회가 되면 자세하게 쓰고도 싶지만, 그때도 그대로 덮어두고 싶은 마음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오산중학교로 다시 온지 6개월 만에 이대부중으로, 6개월 만에 이대부고로 옮겨 오늘까지 지냈다.

오산중학교에서 이대부중으로 옮겨갈 때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으로 20년만 버티자고 결심했는데 그 탓인지 27년을 지냈다. 몇 번은 교단생활이 위선이요, 피에로 같아 차라리 남대문시장에서 박수치는 장사꾼이나 흙을 뒤집는 농사꾼이 되려고 사표를 던지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극구 말렸다.

"교사는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

그후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사표를 쓰고 싶을 때마다 그 말씀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용렬하고 참을성 없는 내가 교단에서 33년을 버틴 것은 아버지의 말씀 덕분이었다.

퇴임을 앞둔 이 시점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젊은 날에는 실수도 많았고 잘못 가르친 것도 많았다. 하지만 제자들만큼은 그때의 녀석들이 바로 어제처럼 더 기억에 생생하고 그립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은 진리다. 그때 나는 순수했고 열정적으로 그들을 사랑했다. 그런 탓인지 지금도 그들은 여태 나를 찾아주고 있다. ….

[관련 기사] 33년 정든 학교를 떠나며... 안녕! 제자들이여

 첫 부임지 경기도 여주 신성중고등학교 (현, 여주제일중고등학교) 제자들과 여주 영릉 백일장 대회장에서(1971. 10.)
첫 부임지 경기도 여주 신성중고등학교 (현, 여주제일중고등학교) 제자들과 여주 영릉 백일장 대회장에서(1971. 10.)박도

풍금소리

해방이 됐던 1945년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구미초등학교 교사였다. 그후 아버지는 10.1 항쟁에 연루돼 학교를 그만두셨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와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이 여러 분 계셨기에 나는 늘 '박 선생의 아들'이라는 애칭이 따라 붙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더욱이 3학년 때 담임 김경수 선생님은 아버지의 제자로 대구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모교에 와서 처음으로 우리 학급을 맡았다.

어느 하루 그날은 청소당번으로 청소가 끝나자 몇 악동들이 책보를 교실에 두고 운동장에 가서 막대치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런 중, 문득 "학교 일찍 끝나면 소먹이로 가라"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라 그제야 놀이를 끝내고 책보를 가져가고자 복도를 통해 교실로 갔다.

교실로 다가가자 그때 풍금소리가 들렸다. 담임선생님이 텅 빈 교실에서 혼자 풍금의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교실 문을 열 수 없어 유리창 틈으로 선생님의 풍금 두드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풍금의 건반을 두드렸다. 흡사 그 모습은 교실에 걸린 베토벤의 초상처럼 보였다.

김경수 담임선생님은 모든 교과를 무척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고, 학생들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나는 그만 담임선생님에게 흠뻑 빠졌다. 선생님은 글씨도 잘 쓰셨고, 풍금도 잘 치실 뿐만 아니라 음악 교과서 노래 외에 당신이 작사·작곡까지 해서 우리들의 메마른 정서를 촉촉하게 일깨워 주셨다.

수업 시간 중 옛날이야기는 학동들의 넋을 잃게 했고, 무척 인자하면서도 한번 꾸중하실 때는 우리 반 전원을 고양이 앞에 쥐처럼 벌벌 떨게 했다. 그때 김경수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신성화된 존재였다. 나는 한참동안 유리창 틈으로 풍금을 치시는 선생님을 지켜보면서 이 다음 나도 어른이 되면 김경수 담임선생님과 같은 교사가 되는 꿈을 꾸었다.

 두 번째 부임지 서울 오산중학교 1-12  첫 담임반 학생들과(1972. 5.)
두 번째 부임지 서울 오산중학교 1-12 첫 담임반 학생들과(1972. 5.)박도

국문학과로 진학하다

고교 시절, 나는 매우 어렵게 학교를 다녔지만, 많은 선생님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고1 때 백일장에서 나의 시가 입선되고, 이듬해는 교내 문예 현상 공모에 내 소설이 당선되자, 특히 나를 아껴 주신 박철규 국어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국문학과로 진학하라고 내 등을 두들겨 주셨다. 친구들도 내 이름 대신 '시인' '소설가'란 애칭을 불러 주며 문필가의 길로 권유했다.

고1 때 새해 이른 아침, 나는 조간신문배달을 마치고 북악산 정상에 올라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내 꿈을 확정지었다. 이다음 교사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겠다고.

내 어린 시절의 꿈은 서울 한복판 학교의 고교 교사가 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자란 시골보다 더 벽촌인 산촌이나 어촌의 초등학교 교사가 돼 수업이 일찍 끝나면 학동들과 함께 시냇가에서 메기·붕어를 잡고, 무·배추·호박을 심는 시골 교사가 되는 게 내 꿈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청순한 내 꿈은 성장하면서 바래졌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로서는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교사는 전 과목을 잘하는 만능이어야 하는데, 나는 음치인데다가 풍금은 두드린 적도 없었다. 게다가 체육을 잘하지 못하기에 그만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고자 했다.

나는 교사가 되는 가장 지름길이요, 정통 코스는 사범대학에 진학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법대나 상대로 진학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한 귀로 흘려들은 채 애초 목표대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지원서를 넣고 시험을 쳤으나 실력 부족으로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마침 1965년 그해 고려대학교에서는 문과대학과 이공대학이 후기로 전형을 진행했다. 그래서 후기에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응시한 결과 다행히 합격했다. 2학년 때부터 교직을 선택했고, 3학년 때부터는 학훈단을 지원해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게 됐고, 국어과 2급 정교사 자격증도 받았다.

 세 번째 부임지 중동고교 제자들과 소풍지에서(1975. 10.)
세 번째 부임지 중동고교 제자들과 소풍지에서(1975. 10.)박도

1박 2일 외출

군 복무 중 제대 무렵은 보병 제26사단 73연대 1Cap 소대장이었다. 단위 부대장이라 외출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때 나로서 전역 후 취직 문제가 여간 심각하지 않아 한 달 앞두고 상관의 허락을 얻어 1박 2일 서울로 외출을 하게 됐다.

외출 첫날 모교 대학을 찾아가자 박병채 교수님이 학과장이셨다. 박 교수님은 대단히 반기시며 지금 당장 파주의 한 여고로 가라고 주선해주셨지만, 한 달 후에야 갈 수 있다고 했더니 그러면 이력서를 두고 가라고 이르셨다. 정한숙 교수님은 우선 급하면 전역 후 당신 조교로 오라고 했다.

그 이튿날은 모교 고교를 찾아갔다. 나를 국문과로 가라고 인도해 주신 박철규 선생님은 당신 아들이라도 찾아온 듯이 대단히 반겨 맞으며, 내 사정을 경청해주셨다. 그때 박 선생님은 교무부장 보직을 맡고 있었다.

"지금은 학기 도중이라 모교에는 자리가 없네. 아마 다른 학교도 마찬가지일 거네. 그리고 서울시내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교사 초빙에 경력자를 우대하니, 우선 서울 가까운 시골학교에 가서 경력을 쌓게."

박 선생님은 그런 말씀과 함께 계동 입구에 있는 사학회관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박 선생님과 작별한 다음 곧장 사학회관을 찾아갔다. 사학회관은 내가 한때 조선일보 계동배달원이었을 때 첫 배달집인 계동 어귀 계산한의원 바로 옆 건물이었다.

사학회관 2층 사무실로 들어서자 회전의자에 앉은 분이 눈을 둥그렇게 뜨면서 물었다. 아마도 군복을 입은 사람이라 의아했던 모양이다. 내가 방문 용건을 말하자 그분은 자기는 사무총장 원길린이라고 말하면서 이력서를 두고 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준비해간 용지에 이력서를 쓴 다음 원 사무총장에게 드렸다.

"저한테 숱한 사람들이 이력서를 들고 찾아왔지만, 현역 육군 중위는 처음입니다. 최우선으로 알아보지요."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박 중위의 자세에서 모든 걸 읽었습니다."

 마지막 근무지 이대부고 학생회 간부들과 교정에서(1989. 5.)
마지막 근무지 이대부고 학생회 간부들과 교정에서(1989. 5.)박도

전역날 취직이 결정되다

1971년 6월 30일 오전 10시, 사단 연병장에서 전역식을 마친 뒤 곧장 서울로 온 뒤 이력서에 연락처로 적은 둔 고모네 집에 들르자 그새 사학회관에서 두어 번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면서 즉시 사학회관을 가보라고 했다. 나는 더플백을 고모네 집에 둔 채 군복을 입은 그대로 사학회관으로 갔다.

"어서 오시오. 박 중위님!"

원 사무총장이 반겨 맞았다.

"지방 학교라도 가겠습니까?"
"그럼요."

사실 나는 그때까지 서울학교와 지방학교의 차이를 모르는 숙맥이었다.

"여러 학교에서 박 선생을 탐내는데,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경기도 여주 신성학원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원 사무총장은 그 자리에서 신성학원 이사장에게 전화 연결을 한 다음, 나에게 이튿날 아침 10시까지 명동에 있는 그분 사무실로 찾아가라고 했다. 

(* 다음 글에 계속)
#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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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전국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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