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부임지 경기도 여주 신성중고등학교 (현, 여주제일중고등학교) 제자들과 여주 영릉 백일장 대회장에서(1971. 10.)
박도
풍금소리 해방이 됐던 1945년 내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구미초등학교 교사였다. 그후 아버지는 10.1 항쟁에 연루돼 학교를 그만두셨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아버지와 함께 근무했던 선생님이 여러 분 계셨기에 나는 늘 '박 선생의 아들'이라는 애칭이 따라 붙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더욱이 3학년 때 담임 김경수 선생님은 아버지의 제자로 대구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모교에 와서 처음으로 우리 학급을 맡았다.
어느 하루 그날은 청소당번으로 청소가 끝나자 몇 악동들이 책보를 교실에 두고 운동장에 가서 막대치기를 하자고 했다. 그래서 몇 시간 동안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런 중, 문득 "학교 일찍 끝나면 소먹이로 가라"는 할머니의 말이 떠올라 그제야 놀이를 끝내고 책보를 가져가고자 복도를 통해 교실로 갔다.
교실로 다가가자 그때 풍금소리가 들렸다. 담임선생님이 텅 빈 교실에서 혼자 풍금의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교실 문을 열 수 없어 유리창 틈으로 선생님의 풍금 두드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혼자 노래를 부르면서 풍금의 건반을 두드렸다. 흡사 그 모습은 교실에 걸린 베토벤의 초상처럼 보였다.
김경수 담임선생님은 모든 교과를 무척 재미있게 가르쳐 주셨고, 학생들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셔서 나는 그만 담임선생님에게 흠뻑 빠졌다. 선생님은 글씨도 잘 쓰셨고, 풍금도 잘 치실 뿐만 아니라 음악 교과서 노래 외에 당신이 작사·작곡까지 해서 우리들의 메마른 정서를 촉촉하게 일깨워 주셨다.
수업 시간 중 옛날이야기는 학동들의 넋을 잃게 했고, 무척 인자하면서도 한번 꾸중하실 때는 우리 반 전원을 고양이 앞에 쥐처럼 벌벌 떨게 했다. 그때 김경수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신성화된 존재였다. 나는 한참동안 유리창 틈으로 풍금을 치시는 선생님을 지켜보면서 이 다음 나도 어른이 되면 김경수 담임선생님과 같은 교사가 되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