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늘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찾아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났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 대통령이 대외적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지난 10월 25일 첫 번째 사과, 11월 4일 두 번째 대국민 사과 담화문 발표에 이어 세 번째다. 국회의장과의 면담은 이번에도 역시 10여 분만에 끝났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밝은 표정으로 국회를 찾았던 박근혜 대통령은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국회를 떠났다고 한다. 소통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국회의장이나 사람들의 반응이 기대한 것과는 달랐던 모양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국회의장에게 국회가 총리를 추천해 준다면 총리로 임명해 실질적으로 내각을 통할해 나가도록 하겠다'며 김병준 국민대 교수에 대한 국무총리 내정을 철회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이번 국회의장과의 면담이 일부 언론들과 새누리당, 박근혜 대통령이 주장하듯 전향적으로 입장을 바꾸어 난국 타개하려는 의지를 보인 것은 아니라고 본다. 성의 없던 사과와 통보에 가까웠던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 카드가 불러일으킨 역풍을 가라앉히고 어떻게든 임기를 채우려는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는 박근혜 대통령의 오늘 발언에 숨어 있다.
여야가 합의하여 국무총리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는 말은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은 더 이상 자신이 아닌 국회에 있다고 책임을 떠넘기는 발언이다. 헌법에 따르면 국회의 동의 없이 대통령은 국무총리를 임명할 수 없다. 대통령이 2선으로 물러나 국정에서 손을 떼겠다는 언급도 없이 여야가 합의한 국무총리를 임명하겠다는 것은 기존에 대통령이 국무총리를 내정하고 청문회를 거쳐 국회의 동의를 얻는 과정 중 내정하고 청문회를 거치는 과정만 생략하자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이 말의 진의는 앞으로 국무총리가 궐석인 책임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회에서 합의하지 못한 여야, 특히 야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국회가 여야 합의로 추천해서 임명된 국무총리에게 오직 헌법에 명시된 권한만 인정하겠다는 언급에서도 더욱 분명해진다.
실질적으로 내각을 통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헌법 제86조 2항을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국무총리는 헌법에 따라 실질적으로 행정각부를 통할하게 되어있다. 대통령이 2선으로 물러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는 이상 대통령이 사용한 '실질적'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실질적으로' 헌법에서 규정된 내용만 국무총리에게 허락하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주어진 권력은 내려놓을 생각 없고 국회를 방문해 '불통'의 이미지만 조금 불식하고 책임을 국회, 특히 야권에 떠넘기겠다는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그래서 대국민 사과 담화문에서도 등장했던 국가 경제 위기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 것이다. 수출 부진과 조선/해운 구조조정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여야가 힘을 모으고 국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주문했다. 이 말은 여야가 합의해서 조속히 국회가 국무총리를 추천하라는 주문임과 동시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앞으로 전개될 경제와 민생 문제들은 자신보다는 국회의 책임이 큰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말로 들린다.
박 대통령이 모두에 발언한 '대통령으로서 책임'은 명확해졌다. 국회를 방문해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고, 국무총리 임명의 책임을 국회에 돌리고, 앞으로도 흐트러짐 없이 지금까지 해 온대로 할 것이라는 것을 자신이 등장하길 기다리고 있는 국회와 국민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 그것이 박근혜 대통령이 생각한 대통령으로서 책임이다.
야당이 국민들이 인정하건 말건 박근혜 대통령은 공을 던졌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시나리오대로 야당이 따라오지 않으면 왜 대통령으로서 책임을 다해 힘껏 공을 던졌는데 왜 안 받았냐며 국정파탄의 책임을 국회, 특히 야당과 자신을 반대하고 퇴진을 주장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사태의 본질을 회피한 채 이런 정치쇼를 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나 그 주변에 뭉쳐 있는 이들이 대통령에겐 더 이상 던질 공이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빈손이다. 설사 던질 공이 남았다 해도 지금은 그 공을 던질 때가 아니라 조용히 발아래 내려놓고 경기장에서 퇴장할 때다. 야당과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이 점을 이해할 때까지 목소리 높여 가르쳐 줘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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