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소공원, 피라미드
정현미
그래서, 몽쏘 공원에는 독특한 구조물들이 있다. 현재 공원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시설물은 평등공의 지휘로 꾸며졌다. 평등공은 취향껏 다양한 구조물을 넣었는데, 연못 옆으로 조성된 기둥만 있는 조형물은 처음부터 그렇게 지어졌다. 폐허나 무덤같은 장식부터 피라미드나 지금은 사라진 여러 기계 기구까지 평등공의 취향대로 다양하게 채워졌다.
21세기의 시각에도 평등공은 괜찮은 취향을 지닌 듯하다. 오를레앙가는 대체로 자유주의 사상가들로 깨어있는 지식인이었다 한다. 물론, 정치적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국왕의 형제가문으로 왕위 계승권자이지만 실제 승계 가능성은 적다는 점에서, 못 받을 왕위에 대한 반항심리로도 읽힌다.
어째뜬, 역사는 평등공을 시대를 앞서보는 혜안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오를레앙 가문의 최초이자 유일한 '평등'공은, 혁명으로 유력 귀족들의 목이 잘려가는 와중에도 자유적이고 개방적인 발언 덕에 영지와 목숨을 보존한다. 아들이 사고치기 전까지 말이다.
아들 루이 필리프 1세(아래 루이-필리프, 1773~1850)는 야심가였다. 혁명이 발발하고 프랑스는 국내외로 전쟁에 시달리는데, 어린 루이-필리프도 이런 정쟁에 참가했다. 다만, 오스트리아군과 함께하는 왕위탈환을 꾸미다 혁명군에게 들킨 게 나빴을 뿐이다. 덕분에, 아버지는 사형당했고, 21년간의 루이-필리프 해외망명생활도 시작된다. 혁명군에겐 나라를 팔아버리려던 매국노로, 왕당파에겐 루이 16세 사형에 찬성한 배신자로 공공의 적이 된다.
오를레앙가의 귀환 흔히 정치인에겐 영원한 적은 없다고 한다. 프랑스 왕가의 마지막 후예들도 그랬다. 루이 16세의 동생이던 루이 18세는, 혁명황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실패하자 왕권을 되찾는다. 그러나, 정세는 여전히 불안했고, 왕실은 위기에 대응해 다시 뭉친다. 그렇게 형을 사형시킨 오를레앙 가문을 사한다. 덕분에, 루이-필리프의 긴 망명 생활은 끝나고, 작위와 덤으로 재산도 물려받는다. 몽소의 주인이 귀환하는 거다.
다만 루이-필리프가 돌아올 쯤엔, 공원 안 주거용저택은 이미 부서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오를레앙가는 꽤 오래 이 지역을 가지고 있다가, 1860년 파리시에 매각한다. 매각 시점이 루이-필리프가 죽고 몇 년 후인 걸 감안하자면, 그 전후 사정은 모르긴 몰라도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 있지 않았으려나? 단순히 생전엔 부지를 팔 필요가 없을만큼 부유했을지도 모른다. 어째뜬, 값은 제법 잘 받았을거란 짐작이 어렵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