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세계문화유산 정릉.
곽동운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 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 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