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작가의 인생이 공인되지 않았다"

[한하운 타계 41년, 인천에서 그를 재조명하다 ⑤] 한하운을 역사에 남기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

등록 2016.11.24 13:35수정 2016.11.24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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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둥병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은 1975년 2월 28일 인천시 부평구 십정동 산39번지의 자택에서 간경화로 사망했다. 당시 56세였다. 그가 인천에 정착한 지 25년만이다. 짧은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인천과 부평에서 살았던 것이다.

어린 나이에 한센병으로 불운의 삶을 살았던 그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나이 40세인 1959년 음성으로 판명돼 성혜원을 떠나 사회에 복귀했지만, 한센병 환우들을 잊지 않고 부평에 거주하며 죽는 날까지 한센인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계속 했다.


인천시는 올해 '인천 가치 재창조' 선도 사업의 하나로 부평구가 제출한 '한하운 재조명 사업'을 선정했다. 사업으로 한하운 시비와 사이버문학관 건립, 한하운 백일장 개최 등, 여러 가지를 구상하고 있다.

<시사인천>은 한하운의 삶과 문학을 재조명하고 그의 삶과 문학이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아보고자 기획취재를 진행했다. 연재 마지막인 이번호에는 '시인 한하운을 역사에 남기는 작업을 하는 인천 사람들'을 다뤘다. -기자 말

부평구의 한하운 재조명 사업, 인천가치재창조 선도 사업에 선정

인천시가 올해 공모한 '인천가치재창조 선도 사업'에 부평구의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한 한하운 재조명 사업'이 선정됐다. 이 사업은 ▲조사ㆍ연구사업 ▲홍보사업 ▲추모ㆍ기념사업 등, 크게 세 개로 분류된다.

부평구는 조사ㆍ연구 사업으로 한하운이 거주했던 십정2동 일원을 조사해 자료 발굴과 심층 연구를 진행하고, 그 결과물을 책으로 출판할 계획이다. 또한 조사ㆍ연구 성과를 공유하기 위한 학술세미나 개최를 준비하고 있다.


홍보사업으론, 한하운 특별기획전을 지난 5월부터 8월까지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열었다. 이후 한하운 온라인 문학관을 개설해 시인의 작품 전문을 열람할 수 있는 문학관(도서관)을 구축하고, 방문객들과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구축할 예정이다.

추모ㆍ기념사업으로는, 한하운 시인의 가치관인 생명 존중과 공존을 주제로 한 백일장을 인천지역 중ㆍ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개최할 계획이다. '한하운 문학상' 제정과 포상으로 인천 지역만의 문학 브랜드 개발에 일조할 고민도 하고 있다.


부평구가 시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에는 '한하운과 관련한 학술연구가 현재 전무한 상황으로, 사업수행 선행 사업으로 학술연구를 진행해야 함'이라고 서술됐다.

이어서 '학술연구로 생애부터 마지막 작품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관련 자료들을 발굴하고 수집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한하운을 심층 조사ㆍ연구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팀장.

김정아 부평역사박물관 팀장. ⓒ 김영숙


이 사업의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부평역사박물관의 김정아 팀장은 "지난 8월부터 사업을 본격화했다. 박물관 담당자들은 8월부터 매주 금요일 점심시간을 반납하고 2시간 동안 한하운 전집을 보면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부평에서 언젠가 한하운 시인을 다뤄야 한다는 짐이 있었다. 부평역사박물관 예산만으로는 조사사업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마침 인천가치 재창조 관련 공모사업이 있어서 참가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그 이전부터 부평에서는 민간차원에서 운영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해왔다. 이번 사업에서 부평구는 주관단체로 운영을 총괄지원하고 지도ㆍ감독한다. 행정지원뿐 아니라, 유관기관과 연계 역할을 한다. 부평역사박물관은 자료 발굴과 연구사업, 기념과 전시사업 등의 실무를 총괄한다. 이외에 운영위원회와 전문연구협의체가 별도의 기관으로서 사업방향을 설정하고 사업을 진행하는 데 자문기구 역할을 한다.

지난 5월 최종 확정된 이 사업은 조금 주춤거리기도 했다. 몇 달 전 운영위원회를 꾸려 첫 회의를 하려 했지만 운영위원회 구성에 어려움을 겪으며 회의 개최가 지연됐고, 사업비도 9월에야 지급됐다.

김정아 팀장은 "실제 사업을 시작한 때는 오래 되지 않았다. 돈이 들어와야 계약을 맺거나 사업을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뒤 "사업 수행 기간은 내년 말까지라 아직 시간이 있다"고 덧붙였다.

인천문화재단, 한하운 자료 망라해 전집으로 엮어
 
 인천문화재단은 한하운 시인 출생 90년이자 서거 35주기였던 2010년 ‘한하운 전집’을 발간했다.

인천문화재단은 한하운 시인 출생 90년이자 서거 35주기였던 2010년 ‘한하운 전집’을 발간했다. ⓒ 김영숙


인천문화재단(이하 재단)은 지난 2010년 한하운 시인을 인천문화예술 대표인물로 선정하고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조명하고자 '한하운 전집'을 발간했다. 2010년은 한하운 시인 탄생 90주년이자 서거 35주기였다. 재단은 한하운 시인의 단행본ㆍ잡지ㆍ친필 유고 등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자료들을 한 데 모아 시인의 문학 활동 전모를 처음으로 선보였다.

당시 심갑섭 재단 대표이사는 전집 발간사에서 "나병 시인 한하운이라는 일면적 이해를 넘어 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희귀 자료들을 망라함으로써 소수자 문학으로서의 한하운 문학이 지닌 의의에 대해 조명할 수 있도록 꾸며졌다"고 했다.

전집을 엮은 편집위원회에는 윤영천 인하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김신정 인천대 교수와 당시 재단 사무처장이었던 이현식 현 한국근대문학관 관장이 함께 했다.

편집위원회는 전집 책머리에 "한하운의 대중적 인지도는 '천형'으로 불린 나병과 평생 싸워온 그의 특이한 이력 때문에 형성됐기에 그의 시적 전모(全貌)보다는 나병을 둘러싼 몇몇 직접적 경험을 담은 시편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고 한 뒤 "나병과 싸우면서도 밝고 아름다운 이상향을 꿈꿔온 시인인 만큼 그의 시편에는 직접적 경험이 깊이 새겨있고 이런 사실성과 구체성은 그의 많은 산문에 깊이 각인됐다. 이번에 그의 산문을 망라해 그야말로 그의 작품세계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모쪼록 이 전집을 통해 한 시인의 전 작품세계를 통한 정당하고도 적확한 해석과 평가가 이뤄지길, 깊은 마음으로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현식 관장은 한하운과 관련한 자료를 충실하게 모은 일은 잘 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인물을 재조명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문인이든, 일반인이든, 정치인이든 남겨놓은 기록을 모으는 일이다. 그런 입장에서 전집을 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게 중요한 취지였다. 전집의 신뢰도를 높이려면 자료들을 취사선택해야 한다. 검증하고 취사선택하는 문제는 연구자들이 해야 한다. 한하운 편집위원회를 전문가들로 구성했다. 재단이 큰 돈 들여 공연 등의 행사를 하기보다 기초작업에 충실하게 힘을 쏟은 건 잘 한 일이다."

이 관장은 편집위원으로서 전집 작업의 한계에 대해서도 말했다.

"자료를 취합했지만, 신뢰할 수 있는 자료인지 검증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춘원 이광수는 신뢰받는 전집이 없다. 왜냐면 친일행적을 하면서 남긴 여러가지 글이 있는데 일부 가족이 가필했다는 말이 있다. 원고를 빼고 넣고 바꾸는 건 간단하다. 그래서 자료를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그 사람의 자료인지, 후대에 의해 조정된 건지 등의 문제를 신뢰도 높게 검증해야 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문인들이 잡지 등에 발표한 건 대부분 신뢰할 수 있는 자료다. 그런데 지금 '한하운의 자료는 신뢰할 수 있나?' 하는 물음이 생긴다. 예전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발표한 작품들을 신뢰하기 어렵다. 아니 신뢰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철저히 검증해야 했다."

'모든 걸 의심하자' 철저한 고증작업 선행해야
   
 이리농공전문대학총동문회는 1997년 전북대 익산 캠퍼스 안에 한하운 비를 건립했다. 비에 새겨진 경력에는 1940년에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했다고 적혀있다.

이리농공전문대학총동문회는 1997년 전북대 익산 캠퍼스 안에 한하운 비를 건립했다. 비에 새겨진 경력에는 1940년에 이리농림학교를 졸업했다고 적혀있다. ⓒ 김영숙


이현식 관장은 철저히 검증하지 않은 결과 한하운에 대해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게 있다고 했다.

"예를 들면 한하운이 중국과 일본에서 수학했다는 이력이 있는데, 원래 연구자들이 해당 작가의 학적부를 다 뗀다. 그런데 현재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되는 대상들은 식민지시대 작가들이다. 한하운은 그 이후 세대다. 본격적인 연구 대상이 아니라서 학계에서 작품이나 작가의 인생이 공인되지 않았고, 박사논문도 없다. 또 하나는, 한하운 전집을 읽어보면 의심 가는 부분이 있다는 거다. 사람이 글을 잘 쓸 때도 있고 못 쓸 때도 있다. 모든 작가에게 굴곡이 있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심할 정도로 작품의 굴곡이 있다. 고증을 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 당시에는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정도로 꼼꼼하게 보지 않았다. 아쉬운 점이고, 오류라고 얘기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하운의 이력에 대해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김정아 팀장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한하운의 이력 중, 이리농림학교(현 전북대)를 1937년에 졸업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전북대 익산 캠퍼스에 한하운 기념비가 있는데 이리농림학교를 1940년에 졸업했다고 쓰여 있다. 1940년이면 기존 이력에는 일본 동경의 성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북경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북대에 연락해 한하운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앞으로 이력 조사를 더 철저히 해 논란이 되는 부분은 확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평구는 현재 한하운의 행적을 빈틈없이 조사하기 위해 일본과 중국에 문학 전공자들을 파견해 조사사업을 벌이고 있다.

김정아 팀장은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한센인 단체 대표도 섭외했다. 참여하겠다고 했다가 회의 당일 안 하겠다고 갑자기 입장을 바꿔, 당황스러웠다. 어떤 한센인단체 대표는 한하운을 거짓말쟁이라고도 했다. 그의 시에 나오는 한센병 증상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의 증상이 거짓인지, 행적이 거짓인지 확인해야 한다"고 한 뒤 "하지만 나병 퇴치와 한센인의 권익과 복지를 위한 사회활동가로서 업적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그것을 가볍게 여겨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현식 관장은 "한하운 전집을 만드는 과정에서 공과(功過)가 있었겠지만 자료 수집은 잘 했다고 생각한다. 한하운 관련 자료는 거의 있다고 보면 된다. 육필원고도 웬만한 건 다 모았다. 지금 계획을 잡을 순 없지만, 오류가 밝혀진다면 여러 조건과 상황을 봐서 한하운 전집 수정증보판을 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시사인천>에 실림
#한하운 #한하운 전집 #부평역사박물관 #인천시 가치재창조 선도사업 #한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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