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동상. 서울시 중구 장충동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11·26이 규모 면에서 3·1을 능가했다는 점과 더불어, 박근혜에게 불명예스러운 것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3·1운동의 발생 배경과 11·26의 발생 배경 사이에 유사한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다.
3·1운동은 표면상으로는 고종 황제 독살설을 계기로 터졌다. 1919년 1월 21일에 숨을 거둔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됐을 것이라는 소문이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런데 고종은 국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1910년 국권 침탈 당시, 일부 양반들을 제외하고 대다수 서민층은 대한제국 멸망에 대해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1894년에 정부가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을 목격한 뒤로, 조선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으로 열심히 참가했던 일반 백성들이 구한말에는 의병운동과 거리를 둔 데는 그런 원인이 작용했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1910년에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3·1운동 당시의 우리 조상들이 오로지 고종의 죽음에 슬퍼해 거리로 뛰어나왔다고는 볼 수 없다. 물론 미우나 고우나 자신들의 군주였기 때문에 애도의 마음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오로지 고종을 추모할 목적만으로 일본 기마헌병의 총칼을 무릅쓰고 "대한독립 만세!"나 "일본 나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는 볼 수 없다.
1910년 당시만 해도 일본 식민통치에 격렬히 저항하지 않았던 일반 백성들이 불과 9년 뒤에 "일본 나가라!"며 기마경찰들의 총칼 앞에 달려들게 된 데에는 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살아보니 살 곳이 아니구나' 식민통치 9년에 대해 우리 조상들이 냉정한 총평을 내린 것이다. 당시 시위대가 부른 <독립가>란 노래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조선 독립의 소리!십년을 참고 참아 이제야 터졌네.삼천리 금수강산, 이천만 민족살았구나 살았구나! 이 한 소리에!""이럴 줄 알았다면 1910년에 목숨 걸고 식민통치를 막았을 것을" 그렇게 후회하는 백성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조상들이 식민통치의 본질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총독부는 1910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 하에 벌인 일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기 위한 사업이었다.
총독부는 글자도 모르는 농민들한테 '관청에 나와서 토지 등기를 하라'고 선전했다. 그런 등기 없이도 별 탈 없이 살아온 농민들 중에는 그 같은 절차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이 수백만이나 된다. 이런 식으로 토지를 강탈한 총독부는 우리 국토의 40%에 달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했다.
토지조사사업은 지주층에 대한 서민층의 예속을 한층 더 강화하는 결과도 초래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는, 토지소유권은 지주가 갖고 경작권은 소작농이 갖는 이중적 권리 구조가 존재했다. 그런데 일본은 지주의 소유권만 인정하고 소작농의 경작권은 무시함으로써 서민의 경제기반을 근본적으로 위협했다. 이로 인해 소작농들은 지주들에게 더욱더 굽실대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19년 3월 2일, 10대 중후반의 남학생 시위대가 덕수궁 근처의 이화학당 담벼락에 붙어서 "동생들아! 누이들아! 다 나와라! 우리나라 찾자! 너희들, 학교에서 공부만 하지 마라! 나라 먼저 찾고 나중에 공부해라"라며 이화학당 학생들의 시위 참가를 애절하게 호소한 것은, 일본 밑에서는 단 하루도 인간답게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린 학생들도 느꼈기 때문이었다.
여기다가 일본은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고 영혼을 고사시킬 목적으로 민간의 역사서적까지 죄다 압수해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교육을 시행했다. 1910년부터 2년간 일본이 강제로 압수한 서적이 20만 권을 넘는다. 그중 상당수가 지금 일본 왕실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10년 이전에 역사를 공부하고 그 이후에 <조선상고사>를 집필한 신채호의 책에 나오는 참고문헌 상당수가 오늘날 발견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거기 있다.
이렇게 일본이 한국인의 생존권을 빼앗고 영혼을 빼앗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1919년 3월과 4월에 최대 200만 명의 한국인들이 태극기만 든 채 목숨을 걸고 거리로 뛰어나왔던 것이다. 고종 독살설은 한국인들의 분노에 불을 끼얹는 역할을 했을 뿐, 이것이 이 운동의 본질적 원인은 아니었다.
촛불집회와 3.1 운동의 배경은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