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1> 반기문 연설문 의미망.
하지율
유엔은 누리집에 반 총장의 1, 2기 연설문을 모두 공개하고 있다. 반 총장이 1기 때는 무난한 의제인 기후변화에 집중했으므로 2기 당시 민감한 의제들인 ①평화와 안보 ②핵 ③테러와의 싸움 ④군비 감축 ⑤에이즈와 보건 문제 ⑥아프리카 이슈 ⑦인도주의 업무 관련 연설문 396만3963자, 200자 원고지 1만6011매 분량(장편소설 16권을 쌓아놓은 높이)의 데이터를 분석했다. 분석에는 R, 시각화에는 노드엑셀 등의 도구를 사용했다.
우선 그가 어떤 말을 많이 했는지 단어 빈도수를 분석해봤다. 뚜껑을 열자 가장 먼저 깨지는 편견이 있다. 반 총장이 하는 일이 우려하는 것'밖에'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가 우려를 너무 많이 한다는 대중의 비판은 대체로 맞았다. 그는 5년간 881번의 연설에서 셋 중 한 번은(316번) 최소 한 번 이상 '우려'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공통 어간을 갖는 단어들을 통일해 추출한 7560개 단어 중 49위다. 엄청난 서열이다. 대중의 직관이 옳았다.
하지만 사실 우려보다 센 실세들이 있다. <그림1>은 반 총장이 언급한 단어들 사이의 연관 규칙(arules)을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그린 담론 지도다. 이 단어들은 연설에서 반 총장이 언급한 확률이 50% 이상인 단어들이다. 선으로(→) 연결된 두 단어는 함께 등장할 확률이 50% 이상, 출발 단어를 언급할 때 도착 단어도 언급할 확률이 80% 이상임을 뜻한다. 복잡한 설명을 걷어내면, 이 담론 지도는 반 총장의 연설문에서 핵심만 뽑아낸 것들이다. 이렇게 기준을 높이면 언급 횟수 48위 시리아조차 지도상에서 사라진다. 시리아의 구체적 현실은 참혹하지만, 보편적인 이상을 추구하는 국제기구의 관점에서는 시리아도 하나의 회원국이기 때문이다.
유엔이 어떤 구체적인 문제에 접근하든 그 이전에 기본적인 지향점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반기문의 이상은 뭘까. 지도의 2시부터 6시 방향까지 보라색 점들에 주목하자. '세계' '인류' '권리' '평화' '안보' '개발(성장)'. 국제 기구의 수장이라면 중요하게 여길 만한 사안과 가치들이다. 그러나 고려하지 않으면 비난받을 뿐 고려했다고 칭찬받을 만한 것들도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반 총장이 자신의 생각을 실천했느냐인데, 이것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엇갈린다. 리커창 중국 총리나 메리 로빈슨 아일랜드 대통령 같은 외국 지도자들은 '반기문은 사회적 약자를 재조명했다'고 호평했고, 팔레스타인 시위대는 '이스라엘과 미국 편만 드는 자'라며 신발을 던졌다. 한국인은 어떠한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남북 관계 이슈를 검증해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후속 기사에서 다루고 여기서는 이상과 실천의 연결고리부터 추적해본다.
우선 모든 국제 문제와 해결의 중심에는 '나라'들이 있다. 유엔의 '구성원'은 회원국들이다. 이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적절한 '대응'을 해야 할 책임이 있고 '정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일'이 돌아가려면 '리더'들도 움직여야 한다. 그럼 문제는 정확히 어떻게 문제를 풀어야 할까. 나라들을 둘러싼 초록색 점들에 주목하자. 어떤 나라들은 '지원'이 '필요'하고 '도움'을 줘야 한다. '정부'와 '위원회'들이 나서야 한다.
그런데 지원과 도움이란 주는 쪽 입장에서는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이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실현의 결과이자 현실이다. '헌신'은 명백한 수단이지만, 헌신의 영단어 커밋먼트(commitment)는 '위원회'를 뜻하는 커미리(committee)와 공통 어간을 가져 중첩되므로, 엄밀하게 따지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수단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때 지도 가운데에 일관되게, 또 꿋꿋하게 고개를 든 키워드가 하나 있다. 바로 '노력'이다.
단어 빈도수 분석을 해보면 반 총장은 881번의 연설에서 셋 중 두 번 꼴로(559번) '노력' 운운했다. 전체 단어 중 공식 서열은 13위이지만 가지치기를 하고 나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남는 이 전가의 보도야말로 비공식 서열 1위인 것이다. 사람들이 반 총장의 별명을 짓는다면 '우려왕'보다는 차라리 '노오력왕'이라고 지어줘야 옳다.
구조를 때리지 못 하는 '노오력'은 사회의 결과값을 왜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