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립 이천 호국원 26-14구역 좌상단에 안치된 내 아버지 국립 이천 호국원 26-14구역 좌 상단에 안장되기 전
서치식
암으로 인해 2013년 11월 12일 서울대학병원에서 후두를 적출하는 수술을 받아 목소리를 완전히 잃으신 후 만 3년 43일을 사신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브라스밴드를 하신 분이라 70대 중반까지 고향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시며 중후한 바리톤으로 찬양하시던 아버지는 어린 내겐 큰 자부심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목소리를 잃으셨으니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는가?
서울대학병원에서 후두적출수술을 받기 위해 입원하시기 전 마지막 주일예배에서 아버지는 몇몇 교인들과 복음성가 '세상에서 방황할 때'로 특송을 하셨다.
어느 교인에게 당신의 휴대폰을 주어 촬영하게 하신 이 영상 끝부분에서 아버지는 대열에서 벗어나 지휘를 하시는데 이는 당신 특유의 흥과 영원히 목소리를 잃게 되는데 대한 안타까움의 몸짓이다. 이 영상은 장례기간 중 영전에 틀어놓아 많은 조문객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다.
식도 역시 많이 잘라내 식사에도 애로가 많으셨다. 후두를 적출하며 장의 절단된 부위가 수축을 하는지라 주기적으로 풍선시술이라는 것을 해야 했다. 번번이 발생하는 비용과 병원까지 가야하는 번거로움에 당신 스스로 기구를 고안해서 혼자서 하시곤 했다 한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연명하시는 아버님을 뵈며 "아버지가 우리 곁에 계시는 것만 바라는 자식들의 욕심이 오히려 당신께 더 큰 고통만 드리는 것은 아닌지?" 회의가 들곤 했다. 결코 회복될 수 없는 투병 생활이 길어지며 늘 당당하시던 아버지는 의기소침해지셨다. 역시 약하신 어머니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셔야 했다.
그렇게 힘겹게 버텨나가시던 아버지는 추석이 지난 9월 어느 날 쯔쯔가무시에 감염되어 논산의 백제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으셨다. 그때부터 전혀 걷지를 못하셔서 휠체어에 의지하셔야 했다.
그 상황이 되자 아직 치료가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아버지는 강하게 퇴원을 요구하셨다. 자의에 의해 퇴원을 한다는 병원 서류에 서명을 하시고서 퇴원을 감행하셨다. 지나고 보니 그 시점부터 내 아버지는 처절하게 이어오던 생존의 끈을 놓고 정리를 시작하신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주의 한 주민센터에서 주민등록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내가 장례 후 사망신고를 위해 유품을 정리하며 보니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미리 발급받아 고이 간수해 놓으셨으며 통장마다 용도와 비밀번호를 꼼꼼히 기록해 두신 것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오래전에 당신 카메라로 스스로 찍은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쓸 것을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는 등 혼자서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