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구멍가게에서 만난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응답한다1988 5 ] 스페인 아저씨가 말하는 세월호

등록 2017.01.09 11:28수정 2017.01.09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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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산티아고790km 론세스바예스의 아침

산티아고790km 론세스바예스의 아침 ⓒ 임충만


춥지만 고요하고 하얀 아침이 나를 반겨줬다. 덜 마른 신발을 신는 것이 아쉬웠지만 피레네 산맥이라는 가장 힘든 구간이 지나갔다. 몇몇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친해졌다. 몸은 아직 고단하고, 장시간 걷는 것이 익숙지 않지만 마음은 가뿐했다. 첫날은 혼자 출발했지만 자연스럽게 종원이와 해인이 그리고 알베르게에서 만난 순례자들과 함께 걸음을 시작했다.

타지에서 만난 인연


나와 해인이처럼 신기한 인연이 있었다. 상효와 종원이었다. 상효와 종원이도 순례길을 걷다 처음 만났는데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비수기라 순례자들이 많지 않은데 나와 해인이 외에도 같은 학교끼리 만날 수 있다니 신기했다. 상효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 중인데 본격적으로 시험을 준비하기 전에 누나의 추천으로 순례길을 걷게 됐다고 했다.

상효의 누나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고 너무 좋아서 동생에게 추천하고 비행기 티켓도 구입해주셨다고 했다. 동생에게 추천뿐만 아니라 티켓까지 사주시다니. 내 동생한테 잠시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승현이는 독일에서 건축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 중이었다. 방학을 맞이해 순례길을 걷기 위해 이곳에 왔다. 해인이와 같은 20살인데 고등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독일로 공부하러 갔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동생들을 보니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다.

그렇게 나 종원, 해인, 상효, 승현이와 함께 이틀째 순례길을 같이 걷게 됐다. 어제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보다 길이 훨씬 좋았다. 길에는 눈이 없었고 경사도 가파르지 않았다. 함께 걷는 친구들이 생겨서 어제보다 훨씬 즐거웠다.

a 장애물 가끔 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었으나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장애물 가끔 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있었으나 크게 어려움은 없었다 ⓒ 임충만


간혹 길을 걷다 폭설과 강풍으로 쓰러진 나무를 만나기도 했다. 축축한 땅 때문에 아직 신발이 젖어 있었지만 눈길을 걷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거기다가 종원이가 자신의 스틱 중 하나를 빌려줬다. 스틱 두 개를 가지고 다니면 사진 촬영할 때 불편하고, 스틱 없이도 일부 구간을 걸어봤으니 자신만만하게 스틱 하나만 가져왔는데 바로 첫날 부러져 난감한 상황이었다.


스틱 없어도 잘 걸을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질퍽질퍽한 산을 걸으려니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했다. 종원이는 스틱이 부러져 없는 것을 보고 자신의 스틱 하나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종원이의 배려 덕분에 나는 좀 더 수월하게 걸을 수 있었다.

a ZUBIRI 수비리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마을로 향했다

ZUBIRI 수비리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마을로 향했다 ⓒ 임충만


6시간 동안 다섯 명이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오후 2시쯤 수비리에 도착했다. 론세스바예스에서는 마트나 가게가 없어서 먹거리를 사놓지 못했다. 우리는 수비리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마을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피자, 빠에야 등의 메뉴를 시켜 나눠 먹고 휴식을 취했다.


길을 걷던 다른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부분 수비리에서 쉰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른 시간. 더 걷기로 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어서 약 5km 떨어진 마을 라라소나(Larrasona)에 도착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라라소나에 도착할 때쯤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많은 비가 내리진 않았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알베르게를 찾기 시작했는데 쉽지 않았다. 알베르게가 닫혀있었고, 3월에는 공식 알베르게를 열지 않는다는 게시물을 발견했다. 수비리에서 더 걸어온 것이 악수가 된 것인가... 다른 순례자들처럼 그곳에서 쉴 걸...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형, 어떡하죠?"
"다른 알베르게나 숙소를 찾아볼까?"

우리는 두 개 조로 나눠 다른 알베르게나 숙소를 찾아봤지만 허탕이었다. 비도 오고 몸도 지쳤는데 다음 마을까지 가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다시 5명이 다 같이 모여 걸었다. 마침 어떤 아저씨가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알베르게를 찾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했더니 바로 반대편 건물을 가르킨다.

"우와 알베르게야 알베르게!"
"형 진짜 다행이다 휴."

라라소나 공립 알베르게는 겨울철 일정 기간에는 문을 닫는다. 대신 사립 알베르게를 찾을 수 있다. 이 마을 외에도 일부 알베르게는 겨울철 비수기 때는 열지 않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공립 알베르게가 문을 닫았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 아저씨가 알베르게를 일러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헤매거나 다음 마을까지 또 걸어야 했을지 모른다.

a Larrasoana 마을 가게

Larrasoana 마을 가게 ⓒ 임충만


마침 우리에게 알베르게를 일러준 아저씨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한국의 작은 구멍가게 정도? 우리는 알베르게로 가기 전 가게에서 저녁식사 재료를 사기로 했다. 주인아저씨께서는 맛을 보라며 와인을 한 잔씩 따라줬다. 스페인 인심이 이렇게 후하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반가운 글씨를 발견했다.

한글이었다. 스페인 순례길에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한글을 보게 되리라고 생각하진 못했도. 그것도 메뉴나 안내표지가 아니라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글이니 더욱 놀랄 수밖에.

"실례합니다. 저는 한국인이에요. 왜 이 문구가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2년 전 한국에서 학생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침몰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차가운 물 속에서 하늘나라로 간 아이들을 기리기 위한 문구야."

그는 단순히 세월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설명까지 할 수 있었다. 무척 놀랐다. 이 문구는 왜 여기 있는 것인지, 한국 순례자가 놓고 간 것인지, 놓고 갔다면 왜 하필 이곳인지, 아니면 아저씨가 다른 한국사람에게서 받아온 것인지.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친절하게 알베르게 위치를 알려주고, 와인까지 준 고마운 사람. 그 덕분에 알베르게를 찾을 수 있어 감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외국인을 통해 한국의 가슴 아픈 사건에 대해 전해 들은 것이 씁쓸했다. 조금이나마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실천해야겠다.

a 세월호 주인 아저씨가 세월호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세월호 주인 아저씨가 세월호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 임충만


덧붙이는 글 Zubiri에는 5개의 알베르게, Larrasona 3개의 알베르게가 있다. 겨울철에는 열지 않는 알베르게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세월호 #산티아고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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