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5.16광장에서 열린 북괴남침야욕 강력규탄 100만 시민대회
매일경제
박정희의 목적대로 '5.16광장'에서 가장 많이 열렸던 행사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반공대회'였습니다. 선거 전이나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는 무렵이면 여지없이 '북괴남침강력규탄 100만 시민대회'등 관변단체를 동원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5.16광장'은 1997년부터 광장 공원화 사업이 추진되면서 '여의도 광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9년 지금의 '여의도공원'으로 개장하면서 도심 속 녹지이자 시민의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개통도 되기 전 '5.16도로' 기념비 세워져제주 '5.16도로'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하치마키'(일본식 머리띠)라고 부르는 도로였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자 일본군은 마지막 결사항전지로 제주를 선택했습니다.
일제는 제주 전역에 지하갱도와 벙커 등을 만들어 요새화했습니다. 당시 진지가 있던 오름과 한라산 자락을 연결해 무기와 탄약, 보급품을 운반했던 도로의 모양이 '머리띠를 두른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치마키 도로라고 불렀습니다.
군사용 목적과 산림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가 만든 하치마키 도로를 포장하고 확장한 시기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제주 계엄사령관으로 부임했던 김영관 제주도지사 때였습니다.
1962년 김영관 도지사는 군사정부에 건의해 장비와 국토건설단 인력을 지원받아, 너비 6m, 포장폭 4m, 총길이 41.16km 세주와 서귀포를 횡단하는 포장도로를 1969년에 준공했습니다.
당시 험준한 산악 지형을 포장도로로 만든 것은 순전히 박정희는 국토건설단이라는 이름으로 병역기피자나 폭력배 등은 물론이고 무고한 시민까지 불법으로 잡아다가 건설현장에 투입했습니다.
당시 쿠데타 세력이었던 김영관은 국토건설단 일부를 지원받아 장비가 부족한 가운데 인력을 쥐어짜서 도로를 포장했습니다. '5.16도로'를 건설하면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생은 기억되지 못하고 불법적인 군사쿠데타만 기억하는 '5.16도로'라는 이름만 남았습니다.
'5.16도로'가 만들어질 때는 '횡단도로'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1962년 3월 23일 기공식을 한 '횡단도로'는 개통이 되기도 전인 1963년에 '5.16도로'라는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기념비에 새겨진 박정희의 휘호는 청와대를 방문한 제주도 공무원이 받아왔다고 하는데, 정확한 유래는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