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 4철거구역 남일당 빌딩
노순택
스산한 날이었다. 일 년 중 제일 추운 이맘때쯤 날씨는 그저 밖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형벌이다. 그런 날에 그들은 꿋꿋하게 대거리를 하고 있었다. 망루에 선 사람들은 날이 서 있었다. 자기에게 닥친 형벌의 부당함을 스스로 증명하듯, 낡고 초라한 불덩이 몇 개를 간간이 밑으로 내던지며 겨우내 싸우고 있었다.
도시개발 광풍이 불던 2000년의 서울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그때의 서울은 여기저기서 '주거환경정비사업'이라는 이름의 재개발사업이 벌어졌다. 선거만 되면 지가상승을 약속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민망한 약속은 법을 통해 실현되었다. 법은 이 사업을 '도시 저소득주민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멋지게 포장했다(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 제2조 제2항).
주거환경정비 사업의 수혜자는 도시 빈민이었다. 일단 법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살고 있던 '도시 저소득 주민'은 오른 땅 값을 견디지 못해 쫓겨났고 가난한 사람들이 치워진 자리는 번듯한 서울시민이 될 자격 있는 사람들이 채웠다. '서울시 주거환경 개선정책 자문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길음뉴타운 개발 전까지 전세값 4000만원 미만의 주택비율은 83%였지만 이 사업 직후에는 제로로 치달았다. 그곳에 살고 있었던 도시 저소득층 주민 중 단 10%만 뉴타운에 입주할 수 있었다.
2000년대, 서울에서 벌어진 이 사업들은 각각의 양태와 규모로 진행되었지만 발생했던 문제는 매번 비슷했다. 쫓겨나야 하는 사람은 쫓겨나지 않기를 원했다. 쫓아내야 하는 사람은 하루가 급했다. 요식적인 중재가 있긴 했다. 그러나 실제적인 중재는 용역이 담당했고 경찰이 마무리했다. 용산 참사가 있던 해, 서울시는 '동절기 강제철거 예방대책'을 수립해 시행해오고 있다고 밝혔지만, 용산에서의 철거는 겨우내 이뤄졌다.
"지금 겨울인데 갈 곳이 어딨어, 돈도 없는데…"(용산 4구역 철거민)누구 말마따나 돈 때문일지도 모른다. 법은 쫓겨나는 사람들에게 3개월분의 휴업보상비나 4개월분의 주거 이전비를 지급한다고 했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이미 올라버린 집값 때문에 새로운 방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했다. 폭탄처럼 서로에게 돌리고 돌리던 권리금이라는 이름의 영업권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공익사업'이었다. 공익이라는 이름은 국가에게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낼 권리는 주었지만, 쫓겨나는 사람들의 사정은 충분히 헤아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곧 오를 지가를 계산기에 퉁기며 흐뭇해하고 있었을 그때, 누군가는 '공익'에 불복했다. 치워져야 할 사람들이 쉽게 치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가는 영하를 오르내리는 겨울 날씨만큼이나 혹독했다. 버티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이 거대한 개발사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 그리고 그에 대한 이자와 비교되었다. 그들의 사정은 숫자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언론과 시민들은 욕심으로 포장돼 무대로 끌어올려진 철거민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아끼지 않았다. 존재들은 숫자에 떠밀려 희미했던 목소리마저 지워졌다.
그날 새벽, 남일당 망루는 불타올랐다2009년 1월 19일,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 남일당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용산 4구역 철거민 등 30여 명은 강제철거를 막기 위해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만들며 저항했고 건물 밑에는 경찰 3개 중대, 300여 명이 진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망루에는 시너 등 화학성 물질이 가득했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검사 : "특공대원들에게 안에 시너가 있는지, 또 그 양이 얼만지 설명해준 적이 있습니까?"경찰 특공대 제대장: "구체적인 양 같은 것은 전달받은 게 없습니다."검사 : "특공대원들에게 망루 내부 구조에 대해서 설명해준 사실이 있습니까?"경찰 특공대 제대장 : "확인을 못 했습니다."변호사 : "(위험한 현장 상황 때문에) 팀장이나 제대장에게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들어가다 우리 다 죽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특공대원 :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가 팀장쯤 되고 경력이 오래됐으면 약간 보류를 했을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변호사 : "증인 머릿속에는 증인 같은 경찰관이나 피고인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한 겁니까?"특공대원 : "제가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안 됐습니다."만 하루가 넘는 대치였다. 철거민을 내쫓는 게 곧 실적이 되었던 경찰은 조급함을 감추지 않은 채 진압을 강행했다. 1월 20일 새벽, 남일당 망루는 불타올랐다. 철거민 다섯, 경찰 하나. 여섯이 죽었다.
화재사건치고는 이례적으로 대규모로 신속하게 수사가 진행되었다. 검찰은 경찰을 배제하고 수사를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검찰 8명과 수사관 21명,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와 같은 규모의 수사단이 꾸려졌다. 하지만 역대 최고의 규모라고 하기에 수사단은 이상하리만치 잦은 실수를 보였다.
용산 참사 직후 유가족은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총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시신 수습이 이뤄진 날 저녁에 부검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검찰은 유가족의 동의 없이 시신을 부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