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놈들' 발언 사과할 생각 없느냐" 질문받는 반기문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나쁜놈들' 발언 사과할 생각 없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을 뒤로한 채 서둘러 차량으로 향하고 있다.
남소연
"내가 마치 역사에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나쁜 놈들이에요."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언론 비난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 반 전 총장은 지난 18일 대구에서 열린 '삽겹살 토크'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환영 발언에 대해 질문하는 기자들을 '나쁜 놈들'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꼬투리 잡기와 흠집내기식 보도 및 정치 공세에 강력한 어조로 비판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최근 비판 여론에 대한 반 전 총장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관련기사:
반 전 총장님, 제가 그 질문을 한 나쁜 기자입니다 ).
과연 반기문 전 총장에게 지금 언론은 무엇이고, 어떤 언론 상을 그리고 있을까? UN 사무총장 시절을 전후한 반 전 총장의 언론관을 짚어봤다.
외교부 '기름장어', 김선일씨 피랍 비판 여론에 '국민 탓'반기문 전 총장 별명은 자타공인 '기름장어'다. 참여정부 시절 노무현 대통령 외교보좌관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내면서 기자들의 까다롭고 집요한 질문에도 꼬투리 잡히지 않고 요리조리 잘 피한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반 전 총장도 능숙한 외교관이란 의미로 받아들였고 유엔 사무총장 시절에도 스스럼없이 사용했다. 그만큼 언론 대응에 자신감이 넘쳤다는 얘기다.
그런 반 전 총장도 자신을 겨냥한 비판 여론에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외교통상부에 오래 출입하며 <조용한 열정, 반기문>이란 책까지 쓴 이하원 <조선일보> 기자는 지난 2004년 고 김선일씨 피랍 사건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이던 반 전 총장이 기자들과 만나 "이번에 비난받아야 할 곳이 있다면 가나무역 김OO 사장, AP, 외교부인데, 외교부가 뭇매를 맞고 있다"면서 "요즘 내가 움직이면 사진기자 수십 명이 사진을 찍는데 내가 범죄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고 보도했다(
관련기사).
당시 반 전 총장은 오히려 "정부도 잘못했지만 국민들도 위험 지역에 가면 스스로 자기 신변에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 회피가 아니라 외교부 장관을 갈아도 이런 일은 또 생긴다"고 국민에 책임을 넘겼다.
미국 언론 비판에 '피해망상', <알자지라>는 극찬
이런 기름장어식 책임 회피는 유엔 사무총장 시절에도 반복됐다. 반 전 총장은 지난 2007년 유엔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외국 언론의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LA타임스> 논설실장 출신 칼럼니스트인 톰 플레이트는 지난 2013년 반 전 총장 대담집 <반기문과의 대화>(RHK코리아)에서 "책임감 있는 인쇄매체들마저 유엔 사무총장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고 폄하하는 기사를 쏟아냈다. 이 때문에 취임 첫해 반기문은 심한 고립감을 느꼈고 피해망상적인 성향이 강해졌다"고 밝혔다.
당시 반 전 총장은 "사람들은 취임 첫날부터 전임자들과 나를 비교했다"면서 "내가 전임자보다 덜 유명한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런 비교 자체가 공평하지 않다"고 밝혔다. 톰 플레이트는 "그는 유엔 사무총장이라면 언론에서도 품위 있게 다룰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언론의 속성을 모르는 이런 순진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라고 꼬집기도 했다.
톰 플레이트의 조언이 통했을까? 유엔 사무총장 재선에 성공한 2012년 이후에는 오히려 미국 언론의 '무관심'에 더 충격을 받았다. 반 전 총장은 "미국 언론은 유엔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면서 "재선되었을 때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그 소식을 얼마나 보도했는지 아나?(거의 보도하지 않았다)"며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반면 자신과 여러 차례 인터뷰한 중동 매체 <알자지라>에 대해선 "중동 지역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관한 한 알자지라의 보도가 최고라고 생각한다"면서 잔뜩 추켜세웠다.
언론 비판은 인종주의 탓? 편 가르기 갈수록 심해져국내외 언론에 대한 반 전 총장의 편 가르기는 임기 말로 갈수록 뚜렷해졌다. 10년 임기를 모두 마치고 지난 12일 귀국길에 오른 반 전 총장은 비행기 안에서 진행한 <조선>, <중앙>, <매경> 등 국내 보수 매체 인터뷰에서 자신의 언론관을 분명히 했다.
반 전 총장은 "특히 영미 계통 언론들이 나에 대해 비판적"이라면서 "프랑스의 <르몽드>나 <르피가로>는 나를 비판한 적이 없다,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나를 비판한 기사가 있는지 봐라, 아시아에서 비판한 기사는 일본에 조금 있고 주로 한국이다, 중남미도 별로 없다"고 밝혔다.
이번에도 반 전 총장은 자신의 비판 여론을 '인종주의' 탓으로 돌렸다. 반 전 총장은 "역대 유엔 사무총장 8명 가운데 3명이 유럽 사람이고 나머지는 다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 출신이다"라면서 "나는 유럽이나 영국 식민지 출신도 아니니까 (영미 언론들이) '아무 것도 못한다' 이렇게 쓰는 거다, 이게 인종주의다"라고 주장했다.
영미권 언론만 반 총장을 비판한 건 아니었다. <오마이팩트>에서 확인했더니 프랑스 '르몽드'를 비롯한 유럽의 비영미권 매체들도 반 전 총장 재임 시절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관련기사:
영미권 언론만 비판? '르몽드'에 발등 찍힌 반기문).
반 전 총장이 유력한 여권 대선 주자로 부상하면서 한국 언론과의 밀월 기간도 사실상 끝났다. 국내 언론이 반 전 총장과 주변 인물 검증에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비판 보도도 늘었다.
반 전 총장은 "한국 국민과 언론이 많이 지원하고 지지해줘 큰 힘이 됐는데 최근 사무총장을 마감하기 전에 한국에서 너무 많은 비판이 나왔다"면서 "이제까지 나를 자랑으로 생각하던 한국 국민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속상했다"고 국내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
반기문 띄우면 좋은 언론, 비판 언론엔 '나쁜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