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보도연맹 학살 다룬 이런 그림책

[그림책 읽는 아버지] 임경섭 <제무시>

등록 2017.02.10 08:52수정 2017.02.1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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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같은 소리일는지 모르나, 무시무시한 싸움터에서 총이 망가지고 미사일이 나가지 않으면 어떠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잠수함도 구축함도 멈추어 버리고, 전투기나 폭격기도 더는 안 움직이면 어떠할까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레이더가 멈추고, 군사지도는 찢어지며, 군대 짐차도 지프도 모두 안 움직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나중에는 군부대 어디에나 전기랑 물이 끊어지고, 총알이 바위처럼 무거워서 들 수 없다면, 군인이 손에 쥔 칼은 가랑잎처럼 툭툭 끊어진다면 어떠할까 싶어요.


 겉그림
겉그림평화를품은책

1950년 7월 어느 날, 제무시 389호, 436호, 625호가 군인들과 마을에 나타났다. 며칠 뒤 새벽, 제무시들은 읍사무소 창고에 갇혀 있던 마을 사람들을 짐칸에 실었다 (1∼3쪽)

그림책 <제무시>(평화를품은책,2017)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을 어린이한테 읽히기는 쉽지 않을 만합니다. 한겨레가 서로 미워하면서 아주 끔찍하게 죽이고 죽인 이야기를 다루거든요.

그렇지만 한국전쟁 같은 생채기를 이야기할 적에, 또 이 지구별에 바보스러운 전쟁이 아직 그치지 않은 모습을 이야기할 적에 함께 읽을 만하지 싶습니다. 힘센 나라뿐 아니라 한국 같은 작은 나라도 자꾸 군대를 키우거나 미군기지나 해군기지를 늘리는 모습을 다룰 적에 함께 읽을 만하지 싶어요.

그림책 <제무시>는 경상남도 김해에서 벌어진 국민보도연맹 학살을 다룹니다. 다만 누가 총을 쏘고 누가 총을 맞는다 하는 모습을 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누가 어떻게 잡아들이고, 서로 어떤 말을 퍼붓거나 몽둥이질을 하는가 같은 모습도 그리지 않아요.

 속그림
속그림평화를품은책

제무시가 더는 오를 수 없는 숯골 앞에 다다랐다. 마을 사람들이 신은 고무신 행렬과 군홧발 자국이 골짜기 끝까지 이어졌다.'다다닥 탕탕' 총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 울렸다. (7∼9쪽)


그림책 <제무시>에는 '제무시(the GMC truck)'라고 하는 짐차만 나옵니다. 제무시는 군용트럭으로 미국 제너럴 모터스 사에서 만들었대요. 해방 뒤 우리 국군에 넘겨졌는데, 제무시라 불렀다 해요. 이 짐차가 '흰옷에 고무신을 꿴 사람'들을 잔뜩 실어서 깊숙한 골짜기로 실어다 나르는 모습만 나와요.

짐차 제무시는 '총 든 사람'이 시키는 대로 '총 안 든 사람'을 짐칸에 가득 태웁니다. 가파른 멧길도 거뜬하게 오릅니다. '총 든 사람'이 시키는 대로 여러 날에 걸쳐 여러 차례 '총 안 든 사람'이 죽음길로 가도록 이끌어요.


 속그림
속그림평화를품은책

제무시가 시내가 아닌 산길을 올라 숯골로 접어들자 마을 사람들은 신고 있던 고무신을 벗어 밖으로 내던졌다. 숯골에 또다시 총소리가 울리고, 제무시들은 줄지어 산길을 내려왔다. 625호는 마을 사람들이 던져 놓은 고무신을 보았다. 그날 밤, 625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무신들이 산을 이루는 꿈을 꾸었다. (19∼23쪽)

이러던 어느 날 '한낱 물건'이라 할, '고작 쇳덩이'라 할, '그저 짐차'일 뿐이라고 할 제무시 한 대가 꿈을 꿉니다. 사람이 아니지만 꿈을 꾸지요. 총에 맞아 죽은 수많은 사람들이 한때 신던 고무신이 그득그득 쌓이는 모습을 꿈으로 꾸어요.

고개 숙인 마을 사람들이 제무시에 또 채워졌다. 제무시 행렬이 다시 산길로 이어졌다. 625호는 산길을 오를수록 바위처럼 굳어 갔다. 이내 625호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섰다. (27쪽)

 속그림. 죽음길로 가는 사람들이 고무신을 던지다.
속그림. 죽음길로 가는 사람들이 고무신을 던지다.평화를품은책

멀쩡한 사람이 가뭇없이 죽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하던 제무시 한 대가 멈추었다고 해요. 이제 이 바보스러운 죽음길을 달리고 싶지 않답니다. 참말 이런 일이 있었을까요? 총 든 사람이 시키는 대로 따르지 않은 짐차가 참말 있었을까요?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어요. 그림책을 빚은 분이 생각으로 지어낸 이야기일 수 있어요. 그러나 참말 그무렵 어떤 군대 짐차 한 대는 바보스러운 죽임질이 너무 싫고 괴로워서 그만 스스로 망가졌을 수 있어요.

 속그림. 전쟁이 싫은 제무시가 하늘을 날다.
속그림. 전쟁이 싫은 제무시가 하늘을 날다.평화를품은책

짐차라는 몸으로 태어난 '쇠붙이(또는 돌이라고 하는 암석)'는 깊은 숲이나 멧자락에서 오래도록 잠들다가 깨어났을 때(사람이 광석을 캐어냈을 때) 이렇게 죽임짓에 휘둘리는 짐차가 될 마음은 없었으리라 느껴요. 총이나 총알이 된 쇠붙이는 기쁠까요? 미사일이나 전투기가 된 쇠붙이는 즐거울까요? 군화가 되거나 전투모가 된 모든 것들 마음에 웃음이 있을까요?

그림책 <제무시>는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을 그립니다. 이 작은 그림책은 앞으로 우리가 이루면 좋겠다고 여기는 꿈을 그립니다. 서로 죽이는 바보짓이 아닌, 서로 아끼는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립니다. 멍청한 싸움통에서는 스스로 망가지거나 멈추고 싶은 마음을 그립니다. 따스한 마을과 넉넉한 보금자리와 아름다운 나라에서 기쁘게 일하면서 어깨동무하고 싶은 뜻을 그려요.
덧붙이는 글 <제무시 the GMC truck>(임경섭 글·그림 / 평화를품은책 펴냄 / 2017.1.16. / 11000원
)

제무시

임경섭 글.그림,
평화를품은책, 2017


#제무시 #임경섭 #그림책 #국민보도연맹 #평화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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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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