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내고개에서 배내봉에 오르는 길... 땀방울이 송송 솟아나는 된비알입니다.
배석근
산속에 남아 있는 아름다운 우리말 오늘은 배내고개까지 버스로 올라간 뒤 고갯마루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배내'는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 입히는 '배냇저고리'의 배내가 아닙니다. 영남알프스에서 흘러내린 개울물이 내를 이뤄 흐르는데, 그 주위에 배나무가 많아서 냇물 이름이 '배내'가 된 것입니다. 순우리말입니다.
먼 옛날부터 산, 내, 들 이름은 대부분 순우리말이었습니다. 그러던 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상당수가 한자어로 바뀌었습니다. '배내'라는 냇물 이름도 배 리(梨) + 내 천(川) → 이천(梨川)으로 바뀌었고, 마을 이름도 이천리가 돼 버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배내'라는 이름이 아주 사라지지 않고 산골 마을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는 게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배내" 하고 읊어 봅니다. 나오는 소리도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그 소리를 내는 입술 언저리도 활짝 웃는 모습이 되니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배꽃이 하얗게 피어오르는 과수원 옆으로 맑은 시냇물이 졸졸 흘러가는 풍경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이천" 하고 읊어 봅니다. 나오는 소리도 격하지만, 입 모양도 사납게 보이면서 이빨까지 드러납니다. 배꽃과 시내가 어우러지는 풍경은, 당연히 떠오르지 않습니다.(아내 고향이 또 다른 이천(利川), 경기도 이천인데, 이 글을 읽으면 입 모양이 사나워질 것 같습니다.) 시내 이름에서 시작된 배내는 배내큰마을, 배내고개, 배내봉처럼 이 일대에 널리 스며들었습니다.
몸과 마음 흔들리며 산행 시작언제나 그렇듯이 고갯마루에서 시작하는 종주 산행은 초기 20~30분 정도 경사가 급한 된비알을 올라가느라 턱까지 올라오는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할 만큼 힘이 듭니다. 종이 "땡" 울리자마자 상대 선수에게 좌우 스트레이트와 어퍼컷 몇 대를 연속으로 두들겨 맞고 몸이 비틀거리고 멘틀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권투 시합 같다고나 할까요. 배내고개에서 배내봉에 오르는 길도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추운 겨울이지만 땀방울이 송송 솟아난 뒤에야 첫 번째 봉우리 배내봉에 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