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크레이프
심혜진
며칠 전 홍학이 집으로 놀러왔다. 내가 에스엔에스(SNS)에 올린 바나나크레이프(크레페) 사진 때문이다. 크레이프는 밀가루에 우유와 계란, 설탕을 넣어 반죽한 것을 프라이팬에 얇게 구운 것이다. 그냥 먹기도 하고, 꿀이나 크림, 잼 등을 바르거나 과일을 올려 먹는다. 나는 초코 크림을 듬뿍 바르고 바나나를 얇게 썰어 올렸다. 홍학은 초콜릿을 무척 좋아한다. 게다가 궁금한 것은 절대 못 참는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연락이 왔고, 얼마 후 홍학이 집으로 날아왔다. 나는 따끈하고 향긋한 크레이프 한 접시를 홍학에게 대령했다. 이제 막 맛을 보려던 그 순간, 어디선가 벌레 한 마리가 날아왔다. 작고 동그란 모양의 갈색 벌레였다. 이름 모를 풀을 잡초라고 부르듯, 그냥 날파리 정도로 생각했는데 홍학이 바로 그 벌레 이름을 맞춘 것이다. 허당 홍학이 이걸 어떻게 알았지?
대학 시절 종횡무진 하던 홍학은 졸업을 앞두고 몸이 아팠다. 오랜 시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한 탓에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온 것이다. 취업 후 디스크는 더 심해져 책상 앞에 한 시간 앉아 있기가 힘들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몇 개월 동안 병원과 집을 오가며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디스크보다 더 큰, 죽음과도 같은 고통이었다. 일 년 동안 절망에 빠져 있던 홍학은 천천히 깨달았다.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생겼을 뿐이고, 자신의 존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는 걸.
홍학은 수술 대신 운동을 시작했다. 틀어진 몸을 바로잡는 것은 "사지가 벌벌 떨리고 눈물이 줄줄 나는" 일이었다. 몸이 조금씩 좋아지자 이젠 스스로 생활을 책임지고 싶었다. 몸을 쓰는 일도, 사무일도 할 수 없었다. 긴 시간 일하는 것도 무리였다. 집 근처 절에서 허드렛일을 돕고, 마트에서 하루 두 시간씩 물건 진열하는 일도 했다. 요즘은 바퀴벌레 약 광고글을 인터넷에 올린다고 했다. 하루 한두 시간만 들이면 용돈은 벌 수 있단다.
"광고글 쓰면 걸리지 않아?""맞아요. 누군가 신고하면 아이디가 차단돼서 글을 못 써요. 티 안 나게 잘 써야죠."티 안 나게 광고글을 쓰는 비법이 있었다. 우선 바퀴벌레에 대한 전문가 수준의 정보를 자세히 적는다. 벌레로 골치를 앓는 사람의 입장에 공감하는 마음도 필수다. 광고는 맨 마지막에 딱 한 줄만 살짝 넣는다. 대학에서 영화 비평으로 상까지 받은 글쓰기 실력이 아니던가. 홍학은 여기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다른 벌레약 광고까지 맡게 되었다. 홍학의 글쓰기 영역이 바퀴벌레를 넘어 집안에 등장하는 온갖 벌레 대한 정보와 퇴치법으로 확장된 것이다. 권연벌레는 그 중 작은 일부일 뿐이다.
스물세 살 볼 빨갛던 홍학은 어느덧 서른 살의 '벌레전문가'가 되었다.
"앞으로 뭘 할지 진짜 고민이에요." 볼 가득 크레이프를 씹으며 홍학은 미래를 걱정했다. 위로의 말을 할까, 용기를 내라 할까. 잠시 망설였다. "하나 더 먹을래?" "좋아요!" 크레이프를 구우며 생각했다. '마흔 살 넘은 나도 여전히 헤매는 걸...' 날이 따뜻해지면 홍학과 남쪽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헤매는 길에 누군가 함께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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