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연장하라"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탄핵지연 어림없다-박근혜 황교안 즉각 퇴진 특검연장 공범자 구속을 위한 16차 범국민행동의 날' 촛불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박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을 촉구하고 있다.
유성호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이 그 사회 상태의 핵심을 보여주곤 한다. 접촉 가능한, 접근 가능한 것들은 그 사회가 허용한 것이기도 하므로. 그러하기에 금기에는 사회 변화의 도약점이 감춰져 있다. 사회가 그어놓은 경계를 넘을 때 사회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림'으로부터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체제 변화 가능성이 생겨난다.
2017년, 체제는 그대로인 채 얼굴만 바뀌는 걸 우리가 원하는지 물어야 한다. 지금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광장의 정치는 어디에 와있는가. 작년 말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박근혜 퇴진을 함께 외치고 있다. '박근혜 퇴진'은 박근혜 체제의 종언뿐 아니라 박근혜와 함께 체제의 꼭대기에서 온갖 이득을 취하며 권리를 빼앗고 차별하는 세력과의 작별이다. 박근혜 체제는 '박근혜 정권' 홀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시간이 쌓여 만들어졌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박근혜 체제인가, 어디까지가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박근혜 체제인가 묻고 논의하고 결단해야 한다. 무너뜨릴 수 있는 것만 무너뜨릴 것인가. 바꿀 수 있는 사람만 바꿀 것인가. 그것이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다.
그러나 선택이 언제나 그러하듯 선택(과정)은 온전한 개인의 몫이 아니다. 관습과 훈육, 언론을 비롯한 익숙한 것들이 우리의 선택을 강제한다. 그래서 지금이 더 두 눈 부릅떠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도를 넘는 광장?"촛불집회가 도를 넘은 '광장정치의 장(場)'으로 변질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종편을 비롯한 보수 언론이 작년 12월부터 쏟아낸 말이다. 광장에 통합진보당 전 의원 이석기와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의 석방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선전홍보물이 뿌려지자 너나없이 이를 우려하는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석기와 한상균은 박근혜 퇴진과 상관없다고. 그들의 구속은 박근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고.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통합진보당 해산과 한상균 구속은 '최순실'과 관련이 없다며 비판했다.
우리의 박근혜 퇴진운동은 '최순실'에 국한돼 있는가. 게다가 그러한 논리라면 왜 김기춘과 조윤선이 구속됐는지 해명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권 아래서 통합진보당이라는 합법정당이 해산되는 초유의 사태가 50년 만에 벌어졌고, 노동조합의 전국연합체인 민주노총의 위원장이 구속됐다. 정부는 좀비를 불러들이듯이 내란음모죄니 소요죄니 하며 사문화된 법조항을 들먹이며 그들을 고립시켰다.
1970년대나 통할 내란음모죄이기에 대법원은 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은 좀비의 능력을 또 사용하는 게 쑥스러웠는지 소요죄를 기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체제를 유지했던 법의 도구인 국가보안법과 집시법과 일반교통방해죄로 '평범하게' 구속될 수 있었다.
따라서 지금 논쟁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우리 안이다. 박근혜퇴진 비상국민행동 게시판에는 "박근혜 퇴진 이외에 본질을 흐리는 구호는 거부합니다", "박근혜 퇴진부터 시키고 하세요"라며 석방운동을 중단하라는 글들이 올라왔다. 한 언론의 표현처럼 측근 비리에 분노해 모인 '촛불 민심을 왜곡'할 수 있다는 기사들을 보며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그런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이석기 석방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홍보 부스를 차리는 것도 조심스러웠고, 한상균 위원장은 자신의 석방을 내걸지 말라고 했다. 정당을 쉽게 해산할 수 있는 사회, 조합원이 직접 선출한 위원장을 쉽게 구속할 수 있는 사회가 민주적이라 할 수 없음에도, 당면과제인 박근혜부터 퇴진시키자며 민주주의 훼손의 피해자들을 드러내는 걸 두려워했다.
지금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 겁 많고 고분고분한 자세로 '촛불 혁명'이 가능한지, 적당한 중도가 과연 부정의한 권력과 부의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더구나 '체제를 유지한 중도'가 권력에 맞서 싸워서 이 국면을 만든 게 아니다. 분노한 사람들이 만든 광장의 힘이 여기까지 이끌었다.
지난 몇 달을 돌아보자. 촛불 민심은 이미 측근 비리와 비선 실세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촛불 민심은 처음부터 정해지고 고정화된 무엇이 아니었다. 구호의 변화가 말하듯이 우리의 요구는 발전해왔다. 2008년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이 민영화 반대로까지 이어졌듯이, 2016년 박근혜 비선인 최순실 때문에 나온 사람들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에 대한 분노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비루한 삶이 자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가 없는 사회에서 유래한 것임을 어렴풋하게 확신하며 거리로 나왔다. 부자 엄마를 탐하기보다 부자만을 대우하는 사회에 분노했다. '부자되세요'가 더 이상 덕담이 되지 않는 사회, 부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원했다. 복지가 충분하고 차별이 없는 사회 말이다.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체제가 유지되길 원하는 사람들은 '광장정치'의 범위와 힘을 제한하려고 한다. 그들은 주문한다.
"광장에서는 박근혜-최순실로만 모여라, 그 이상은 하지 말라!" 우리 스스로 촛불 민심의 왜곡을 두려워하는 것은 저들이 원하는 '경계에 멈춰서는 일'이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발언권-시민권을 주지 않는 것은 우리 안의 비시민을 만드는 일이다. 어떤 이들은 이석기 석방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튀어서 그렇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통합진보당 해산은 민주주의의 문제지만 이석기 석방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했다. 정말 그러한가.
우리 안의 검열이 만든 것은 아닌가. 스스로 '내가 원하는 세상'에 대한 적극적 사유보다는 그 세상이 무엇과 닮았는지, 무엇으로 지칭되는지 두려워하며 스스로 사상의 자유를 부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마치 1970년대 감옥에 갇힌 일부 양심수들이 자신은 민주투사임을 강조하면서도 조작간첩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들과 구분하려 했던 경향과 비슷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바깥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확장되고 발전돼왔다. 5·18 광주항쟁이 그랬고, 판자촌 빈민들의 투쟁이 그랬다. 기득권 세력이 '낙인찍은 틀'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끼워 맞춰질까 두려워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 권리 없는 사람들의 권리가 외쳐질 때 민주주의는 확장되고 인권의 정치가 시작된다.
민주주의의 외부를 끌어들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