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사지의 석축삼천사 마애불을 지나 부왕동암문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곳곳에 옛 절의 흔적들이 나타난다. 이덕무의 <유북한기>에, 나한봉 아래 절터가 있는데 고려시대 삼천 명의 승려가 거처하였으므로 삼천승동이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종헌
삼천사와 진관사는 북한산 서쪽의 유서 깊은 사찰이다. 지금은 폐사되고 없지만 신혈사라는 옛 절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고려 현종이 왕자 시절 삼각산 신혈사에 유폐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 천추태후가 자객을 보내 살해하려고 했으나 절의 노승이 방에 땅굴을 파서 숨기고 그 위에 와탑(臥榻)을 설치하여 화를 면했다는 고사가 전해온다.
그래서 절 이름이 신혈사이고, 훗날 현종이 왕이 되어 자신을 구해준 노승을 위해 지어준 절이 진관사이다. 이 당시, 왕자가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어 술사(術士)에게 물었더니, 닭은 꼬끼오 하고 우니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를 징조요, 다듬이소리는 어근당하니 임금 자리가 가깝다는 해몽을 내놨다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닭 울음소리를 고귀위(高貴位)로, 다듬이 소리를 어근당(御近當)으로 풀이한 까닭이다.
삼천사는 고려시대 대 가람으로 지금도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 기슭에 옛 절터들이 산재해 있어 당시의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증취봉 아래의 일명 대지암 터는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이곳이 과거 삼천사의 주지이며 고려 현종의 왕사를 지낸 대지국사 법경의 탑비전이 있던 곳임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 당시 삼천사지 발굴 조사에서 각종 도자기류와 기와조각, 석재보살두, 사리함 등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서 그런지 지금도 삼천사를 소개하는 각종 인터넷 자료에는 삼천사지 발굴조사에서 나온 동종(銅鐘)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그런데 삼천사지에서 출토된 동종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다는 말은 과연 사실일까? 결론부터 말하지면 대답은, "아니오"이다. 어찌된 까닭인지 삼천사지에서 출토되었다는 이 동종은 현재 국립박물관에 '동제범종'이라는 이름으로만 보관되고 있으며 더구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지도 않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기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 동종은 안타깝게도 삼천사지 발굴조사와는 관련이 없다. 그나마 관련이 있다면 현재의 삼천사 입구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정도이다.
사실 이 동종은 1967년 11월 당시 고양군 신도면 진관내리에 거주하던 윤경민씨가 집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이후 국립박물관에 귀속되었는데 문제는 왜 하필 이 종이 삼천사지 출토 종으로 둔갑했느냐 하는 것이다.
원인은 이 종의 발견 장소와 시기, 발견자 등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채 거의 50년의 세월이 흘러왔다는 사실이다. 발견 장소는 고려시대 진관사 터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단서가 되는데도 간과되었다.
발견자 역시 발견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증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지금껏 잊혀져 왔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재관리에 큰 구멍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발견지, 발견장소, 발견자 등에 대한 구체적 정보 제공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