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금오산 전경
박도
사람은 제 힘으로 살지 못하면
일제가 위만국(僞滿國, 괴뢰 만주국)을 세운 뒤 항일반만운동을 잠재우고자 1936년부터 '만주국 치안숙정계획'을 만들어 그들 관동군을 40만에서 76만으로 대폭 증강시켜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중국공산당만주성위원회에서는 피해를 줄이고자 동북항일연군 간부들을 소련으로 월경 대피케 하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북만의 전구(戰區)와 그곳 백성들을 지키고자 끝까지 소련으로 월경치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외세에 영합치 않으려는, "사람은 제 힘으로 살지 못하면 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자존심이었습니다.
1942년 8월 3일 새벽, 허 장군님은 진운상 경위원(경호원)과 함께 소부대활동 현지지도 중 위만국(僞滿國, 괴뢰 만주국) 군경 토벌대와 교전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신은 부하를 살리고 항일회원 비밀문건을 적에게 넘기지 않고자 토벌대의 총탄을 벌집처럼 맞고 희생했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김우종 선생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동안 애써 찾던 작중 인물을 마침내 찾은 환희에 젖었습니다. 마치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그런 황홀경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제가 장군님을 만나기 위해 수륙만리 먼 길을 왔다는 어떤 소명의식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다른 고장사람들에게 고향 구미가 5.16 군사 쿠데타 후 벚꽃이 만발한 고장으로 잘못 알려진 데 대하여 매우 침통하게 지내던 중이었습니다.
이듬해 2000년 여름, 저는 혼자 북만주로 달려가서 헤이룽장성 경안현 청봉령 어귀에 있는 장군의 희생지 기념비에 한 다발 들꽃을 바쳤습니다. 그때 그곳 당사 관계자들과 주민들이 저를 허 장군 고향에서 온 빈객이라고 매우 환대해 주었습니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면 더 반갑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허 장군님 영령은 저에 대한 반가움이 그분들보다 훨씬 더 컸으리라 믿습니다. 마치 장군께서 몽매에도 그리던 고향 금오산(金烏山)을 보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