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묶어 두는 데 썼던 기둥여수 선소 유적 내에는 뭍의 선돌처럼 보이는 길쭉하고 큰 바위 하나가 쇠사슬 울타리의 보호를 받으며 서 있다. 이 바위는 대체로 배를 묶어둔 계선주로 여겨지고 있다.
정만진
수군 부족 문제에 대한 기록은 <난중일기>에도 실려 있다. 녹도 만호 송여종은 1594년 1월 21일 '병들어 죽은 214명의 시체를 거두어서 묻었습니다'하고 이순신에게 보고한다. 바로 다음날인 1월 22일에도 '병들어 죽은 217명의 시체를 거두어 묻었습니다'하고 보고한다. 줄곧 물에서 사는 까닭에 수군은 유난히 돌림병에 약했다.
각 수영에서는 이곳저곳 읍을 다니며 사람들을 강제로 연행하여 수군에 편입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이순신이 전라도의 병방 한 명을 참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관을 파견하여 수군을 모집하던 중 현(縣)의 군사 담당 아전이 징집 대상자를 빼돌렸다가 발각되었는데, 이순신이 일벌백계로 그의 목을 베어 성문에 내건 것이었다.
병방 효수 사건은 수군 모집과 관련하여 조정과 이순신 사이에 빚어져 있던 갈등이 마침내 폭발한 사례였다. 처음부터 조정은 '각 고을에서 도망간 군사가 있어도 사변이 평정될 때까지 친족이나 이웃으로 대신 충원하는 것은 일절 하지 말라'는 원칙을 정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1592년 12월 10일 '친족을 대신 충원하지 말라는 명령을 중지하여 남쪽 변방 회복의 기초가 온전해지도록 해 주십시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1594년 4월 10일에도 '지금은 나라를 회복할 시기'라면서 '대신 충원하는 폐단을 중지하는 것은 사변 평정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적의 침략을 막고 백성을 보호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장계를 올렸다. 수군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수사의 입장이 잘 드러난 장계였다.
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든 조선소 유적을 찾아보다1592년 5월 7일 옥포 앞바다에서 임진왜란 발발 이후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거두는 판옥선 24척과, 5월 29일 사천 해전 이래 일본 전함들을 무찌르는 전투에서 한 몫을 한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했던 조선소, 즉 '여수 선소 유적'을 찾아간다. 도시 가운데로 깊숙하게 들어온 포구 형태의 선소 유적은 여수시 선소마을길 33에 있으며, 사적 392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충무공 이순신이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던 군관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막만의 최북단 후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입구에 가덕도와 장도가 방패 역할을 하고 뒤로는 망마산을 등지고 있어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원래 명칭은 순천부 선소이다. 거북선은 이곳과 함께 인근의 본영 선소, 방답진 선소 세 곳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순천부 선소는 임진왜란 전에 생겨 임진왜란 중 전라 좌수영 산하 순천부 수군 기지였던 것이 확실하나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다. 주변의 마을은 예로부터 선소마을로 불리었고, 고려 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곳이 있었다고 한다.현재 일종의 항만 시설인 굴강(掘江, 파서 만든 강)이 남아 있으나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으며,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하였다.'현지 안내판은 거북선 건조에 나대용의 공이 매우 컸다는 사실, 이곳의 본래 이름이 순천부 선소였다는 점, 여수 선소 외에도 방답진(여수시 돌산읍 사무소 일원) 선소와 본영(전라 좌수영) 선소가 더 있었다는 사실, 고려 시대에도 이곳에서 배를 건조했다는 사실, 지금도 배를 보관하고 또 드나들기 위해 만든 굴강 시설이 남아 있다는 사실, 일제 때 많이 훼손되었다는 사실, 근래 발굴을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다는 사실,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한 건물이라는 사실 등 많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다만 본문은 세 곳 선소 중 이곳 여수 선소가 가장 큰 규모와 뚜렷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