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인천항구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극단 십년후의 ‘배우 우배’의 한 장면.
김영숙
인천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초ㆍ중ㆍ고등학교를 졸업한 김 지회장은 서울예전에서 연극을 전공했다. 연기자로 활동하다 1997년 연출로 전향했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다 인천의 한 단체에서 상임연출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2000년부터 인천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요청 외에도 인천에 온 다른 이유가 있었다.
"서울에서 연극하면서 연출가로 발전하려면 선생님을 잘 모셔야하는 관례가 있어요. 그게 저는 소모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제(徒弟=제자)를 중요시 여기는데 저는 선생님들의 후광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아 고향에서 뜻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2003년 극단 '산만'을 만들었다. '산만'은 '우리의 에너지를 퍼트려 무대를 꽉 채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지금 생각해도 좋은 이름이란다. 왜 연극을 하고 싶었는지 물었더니 의외의 답을 했다.
"신학과를 가려고 준비하다 고3 때 갑자기 진로를 바꿨어요. 같은 교회를 다니던 전도사와 싸운 후죠. 내가 성직자가 됐는데 누군가 내 모습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번졌고, '그럼 나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데 어릴 때 교회에서 성극을 하면서 좋아했던 추억이 떠오르더라고요. 그때 연극을 하지 않았으면 나쁜 길로 갔을지도 몰라요."어릴 때 태권도를 8년간 배웠던 김 지회장은 이른바 '힘 좀 쓰는 동네 형들'을 알았고, 그들과 어울려 싸움을 적지 않게 했다. 부모의 불화로 행복하지 않았던 사춘기를 보낸 그는 교회에서 연극 '금관의 예수'를 할 때 한센병 환자 역할을 했다. 예수의 금관을 훔쳐가려는 사람들로부터 금관을 지키려다 맞아 죽은 한센병 환자 역을 하다 '나보다 불행한 사람도 있구나. 나는 결코 불행하지 않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고, 진로를 고민하며 기도한 어느 날 어릴 때 연극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김 지회장은 '신의 게시'라고 생각했다.
인터뷰를 하면서 그의 '반골 기질'이 느껴져 물으니, 자신의 연극은 '정의롭다'는 동문서답인 듯하면서도 정답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정의로움을 좋아해요. 정의로워야 합니다. 값싼 동정심이 아닌, 실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냥 관심 있다는 말만 하는 게 싫어요. 제 자랑이지만, 얼마 안 되지만 유니세프나 국경없는 의사회 등에 후원하고 있습니다. 불쌍하다고 말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 변하지 않아요. 제 연극 중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던 할머니들을 다룬 작품이 있는데 2012년 '나의 조국, 미운 대한민국'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어요. 지난해 서울예대 학생들과 다시 무대에 올리기도 했죠. 연극의 기능 중 하나가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은 힘이 있으니까요."선생님을 모시면서 비굴함을 느꼈던 김 지회장은 그때의 기분이 '더러웠다'고 표현했다. 존경하는 스승님을 모시는 것은 좋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무조건 맞춰야하는 게 천성이 맞지 않았다고도 했다.
연극인으로 살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냐고 물으니, 무거운 일화 하나를 들려줬다.
"우리 극단에 김아무개라는 배우가 있었는데 2015년에 고시원에서 죽은 지 며칠 만에 발견됐어요. 그 친구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잘 한, 재능이 많은 친구였어요. 격투기 한국챔피언을 해서 운동을 했다면 힘들지 않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연극이 좋다고 계속 했죠. 연극을 사랑하면서 마지막에도 연극 작품을 올리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어요. 연극인들의 삶은 그런 거 같아요. 항상 돈에 쪼들리고, 돈에 쪼들리면서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못할 때가 많아요. 가령 경조사비 내는 것도 힘들어서 인간관계가 멀어지고 우리끼리만 만나면서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 계속 연극을 해야 하나, 회의적인 생각도 했습니다. 이 친구가 죽고 나서 예술인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고, 지금도 그런 고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재밌는 연극을 보려면 인천으로 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