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1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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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8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실 사람들은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간다는 게 불안했다. 배를 타고 언제든 프랑스에 상륙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이다. 영국·프로이센·오스트리아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만 빼고 그랬다.
나폴레옹의 유배지가 엘바 섬으로 결정된 데는 러시아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그는 거의 압력 수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그렇게 한 데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속내가 있었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는 영국과 같은 편이 될 수 있어도,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같은 편이 될 수 없는 게 러시아였다.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를 재편한 1815년 빈(비엔나) 회의 이후로 러시아가 영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 지위를 다툰 데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러시아는 영국과 오래 친할 만한 나라가 아니었다.
엘바 섬에 유폐된 나폴레옹그런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멀지 않은 엘바 섬에 유배되는 게 유리했다. 그래야만 영국이 나폴레옹의 부활을 우려해서 거기에 정신력을 소모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도로 러시아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배 가게 되고, 이로 인해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 열강이 나폴레옹의 부활을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두려움을 품은 것은 루이 18세나 유럽 열강뿐만 아니었다. 프랑스 국민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많았다.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이들이 야유와 저주를 퍼부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 했다. 그래서 어떤 구간에서는 일반 병사의 옷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호위하는 병사처럼 가장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웃지 못할 일도 생겼다. 프랑스 군주들에 관한 위인전 작가로 유명한 조르주 보르도노브(1920~2007년)가 집필하고 국내에서도 번역된 <나폴레옹 평전>에 따르면, 이동 중에 체류한 여관에서 나폴레옹은 여관 사장한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 사장은 자기 앞의 사람이 나폴레옹인 줄 몰랐다.
"그렇게 수완 좋은 인물을 프랑스에서 그렇게 가까운 섬에다 둔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그 사람은 전 유럽을 합한 것보다 꾀가 더 많잖아요. (만약 그를 독살하지 않으면)... 석 달 후에 그 인물이 돌아올 거예요."이 말을 한 사장은 여성이었다. 같은 남자한테 이런 말을 들었을 때와는 약간 다른 느낌이 나폴레옹의 몸에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데 '석 달 후에 돌아올 거'라는 사장의 말은 비슷하게 성취됐다. '석 달' 부분은 빼고 '돌아올 거'라는 부분은 성취됐다.
프랑스 황제에서 엘바 섬 영주로 격하된 채 직속 병사 1200명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한 나폴레옹은 세상의 우려를 불식시킬 목적으로 아주 성실하게 행동했다. 영국군 캠벨 대령의 감시를 받은 그는 "나폴레옹은 어디서나 행복하다"는 글을 벽에 붙여놓았다. 그리고 주거지를 손질하거나 지역 주민들을 초대해 파티를 여는 일들로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는 '탄핵인용 결정'에 완전히 승복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쇼였다. "나폴레옹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 것 같다"는 말이 널리 퍼지고, 혁명 과정에서 지배층으로 급부상한 부르주아 계급이 루이 18세에게 불만을 품고, 자신의 유배를 두고 영국과 러시아가 갈등을 빚는 틈을 타서,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6일 군대를 거느리고 엘바 섬에서 탈출했다. 캠벨 대령이 3일 전 이탈리아로 가면서 엘바 섬을 비운 틈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엘바 섬 탈출한 나폴레옹 재기하다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삼색기를 달고 배에 올라탔다. 서쪽으로 항해하는 동안, 그는 영국 선박을 여러 차례 만났다. 배에 혁명의 깃발이 걸려 있고 무장 병력이 잔뜩 탑승해 있는데도, 이상하게도 영국 선박들은 아무런 반응 없이 지나갔다.
그런 행운을 누리며 프랑스에 상륙한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의 군대를 제압하고 11개월 만에 권좌에 복귀했다. 3개월 뒤 워털루 전투에서 패해 영국에 항복하고 저 멀리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기 전까지, 나폴레옹은 무척 행복했다. 탄핵당한 지 11개월 만에 복귀한 '돌아온 황제'의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황제 자리에 복귀하는 과정에는 영국의 의도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영국은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가까이 있는 게 불안했다. 영국이 유럽에 대해 안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자면, 그를 더 멀리 유배 보내거나 아니면 죽여 버려야 했다.
그러자면 명분이 필요했다. 나폴레옹을 확실히 응징해서 재기 가능성을 밟아버릴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나폴레옹이 먼저 도발을 해줘야 했다. 그래서 영국은 마음을 비운 것처럼 행동하는 나폴레옹을 믿어주는 척했다. 캠벨 대령이 엘바 섬을 비운 데도 그런 고려가 작용했다. 영국 선박들이 나폴레옹의 배를 모른 척 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은 그렇게 나폴레옹의 복위를 조장한 뒤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여 확실히 제압한 다음에 저 멀리 대서양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렇게 영국의 배후 조종이 있기는 했지만, 1815년 3월의 나폴레옹은 권좌에 복귀했다는 감격을 누릴 만했다. 어쨌거나 그는 자기 군대로 루이 18세를 제압하고 황위를 되찾은 영웅이었다. 영국의 의도가 드러난 것은 그로부터 몇 달 뒤였다.
나폴레옹과 유사한 처지에 놓인 박근혜나폴레옹을 존경하는 아버지를 둔 박근혜. 지금 그는 엘바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과 유사한 처지에 놓여 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동남쪽 엘바 섬에 유배됐듯이, 그는 청와대 동남쪽 삼성동에 유폐되어 있다. 경찰이 교통통제만 해주면 15분 이내에 청와대에 진입할 수 있는 거리에 그는 유폐되어 있다.
몸만 청와대와 가까이 있는 게 아니다. 심정적으로도 청와대를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청와대에 살면서 누렸던 영광에 대한 미련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헌재의 탄핵인용 결정에 대해 불복하는 듯한 태도를 나타낸 데서도 그런 심리가 표출된다.
물론 헌재 판결은 '죄인'이 승복하든 불복하든 효력을 발휘하지만, 박근혜는 명예회복 혹은 뭔가를 의도하고 있기에 헌재 판결에 승복하지 않는 것 같다. 나폴레옹처럼 권좌와 명예 모두를 되찾는 것은 힘들겠지만, 적어도 명예만이라도 되찾고자 뭔가를 도모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박근혜의 명예회복에는 정치적 투쟁과 승리가 필요하다. 박근혜를 고립시킨 지금의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박근혜를 욕하고 비판하는 게 당연하다는 전제 위에서 새로 짜인 지금의 대한민국 분위기를 뒤엎으려면, 국회·헌법재판소·언론뿐 아니라 SNS 세계까지 박근혜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친박 지지자들의 시위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뒤엎을 만한 정치적 승리를 거두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친박 지지자 백만 명이 광화문을 점거한다 해도 그런 일은 벌어지기 힘들 것이다. 국민들은 촛불집회에 백만 명이 모이면 '5천만을 대표해서 백만이 광장에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친박집회에 백만이 모이면 '수구세력 전체가 총출동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친박집회를 아무리 열심히 연다 해도, 공연히 돈만 쓰고 힘만 소모하게 될 것이다. 그런 친박집회 외에, 달리 박근혜가 기댈 곳은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그가 명예회복에 성공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거기다가 박근혜에게는 1815년 당시 나폴레옹이 갖고 있던 자산들이 하나도 없다. 폐위된 뒤에도 나폴레옹은 재기에 필요한 자산들을 갖고 있었다. 그것들이 박근혜한테는 없다. 그래서 박근혜의 앞날은 더욱더 어둡기만 하다.
1789년에 혁명이 발발할 당시만 해도 나폴레옹은 청년 장교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단시간에 최고 권력자로 급부상한 것은 수구세력의 군사적 도발을 막아내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혁명이념의 전파를 우려한 유럽 열강의 연합 공격도 막아냈다. 그런 공로를 발판으로 단시간에 통령이 되고 황제가 됐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