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품 설명서장방형, 변의, 성상, 경구투여 등의 한자 용어나 불필요한 외래어 사용이 많이 보인다. '1알'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을 10ml로 기재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불편도 있다
강동희
이 글을 읽는 몇몇 분들은 '경구투여가 뭐가 어렵나' 하실지도 모릅니다.글쓴이의 교육 수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요. 하지만 저는 취업 때문에 '셰어 하우스의 순화어는 공유 주택'이라며 순화어 목록을 달달 외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의 한국어 능력을 갖춘 제게도 약 상자의 문구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스티커'를 '붙임 딱지' 따위로 '순화'하는 동안 정작 그 어떤 말보다도 순화하여 쉽고 편하게 써야 할 필요성이 큰 영역이 방치돼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약 상자에 쓰여 있던 문제의 문구는 그냥 '6살 이상 및 어른부터 하루에 한 알씩 입을 통해 삼킨다'고 적어도 뜻이 통하는 말이었습니다.
문득 다른 약들도 그런가 싶어 제가 가진 약들을 살펴봅니다. 다행히도 비교적 건강하여 봄철 알레르기약과 변비약 정도만 준비돼있습니다. 그런데 알레르기약의 설명서를 읽어보니 '성상'은 흰색 '장방형'이고 효능은 피부 '소양증'이며 연령이나 증상에 따라 '증감'할 수 있고 '알코올'과 함께 투여될 수 없으며 엄격한 품질관리를 '필했다'는군요.
변비약에 '변의'... '전의'를 상실했다성상,장방,소양 모두 국립국어원의 순화어 목록에 들어맞는 말은 없습니다. 이번엔 변비약을 꺼내봅니다. 세상에, '변을 보고 싶은 상태나 의지' 를 뜻하는 표현으로 '변의'라는 말이 등장하는군요. 정말이지, '전의'를 상실하고야 말았습니다.
짧은 제 배움에 의하면 한자어는 전문적이거나 구체적인 내용을 담는 경우가 많습니다. 중의적인 표현을 피하고자 일부러 한자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죠. 의약품 분야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양과 생김새가 흰색의 마름모이고 가려움증에 효과가 있다'는 말을 굳이 흰색 장방형으로 쓸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의료 소비자들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병기(같이 씀)하는 정도의 배려는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어린이에게 '거기 찬장에서 장방형 약 얼른 부탁해!'라고 하면 제대로 찾아다 가져올 수 있을까요.
국립국어원의 순화어 정책 역시 정책을 위한 정책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게이트'를 '의혹사건'으로 순화한 것은 그 순화된 말이 여전히 한자어란 점에서 한계가 보이고, '드레스코드'를 '표준옷차림'으로 순화 및 표준화한 것은 아예 단어의 원래 의미 자체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오늘 저녁 표준옷차림은 크리스마스입니다'와 같은 문장이 어색하단 사실만 봐도 금세 알 수 있죠.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쉽게 알 수 있도록 의약품의 설명서는 쉬워져야 합니다. 또한, 국립국어원은 어떤 말부터 순화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를 알고 접근해주길 바랍니다. 필요한 곳에서 순화된 '말'이, 한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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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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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상은 장방형' '1회 경구투여'... 의약품 설명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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