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 Kathe Kollwitz(1867-1945) 작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모든 어머니들의 참혹한 슬픔
정현주
무숙 씨가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친다.
그렇게 25살에 아이를 잃었다. 몸조리도 못하고 바로 산동네 집으로 돌아와 세 살배기 딸을 보살피고 물동이를 져다 살림을 했다. 그렇게 놓친 아이가 돌아왔는지 또 바로 임신이 되었으나 무숙씨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앉아 백일복을 뜨고, 전구를 껴서 양말코를 깁는 부업을 했다. 정부미 혼합곡의 찰기 없는 밥마저 양껏 먹지 못했다. 아이를 먹이고 남편을 챙기고 나면 늘 양식은 부족했다. 길고 긴 점심을 굶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나이 26세, 아이를 품은 임산부로 입맛이 꿀맛이었지만 먹을 것이 없었다. 뱃속의 아이도 당연히 주렸다.
"걔는 영양실조가 된 게 먹지도 못하고, 매일 백일복 뜨느라고 쭈그리고 앉았었어. 애 몸틀 때까지 앉았다가 낳으니 얼마나 작은지 힘도 안주고 쑥 나오더라. 양수만 방으로 하나 터지고 그냥 깨구락지 같았어. 얼마나 작은지."또 아이를 잃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삼 일 만에 일어나 이사를 했다. 돈암동에서 정릉까지 짐을 이고 지고 날랐다. 사람들이 폐병쟁이가 왔나 했다고 한다. 젊은 여자가 얼굴이 노랗고 비썩 마른 게 못쓰게 생겼더라고.
"3일 만에 죽었지. 아버지랑 증조할머니가 데리고 나가서 한강에 얼음구멍을 깨고 넣으려니 쏙 나오고 쏙 나오고 해가지고……. 어디 뒷산에 언 산에 대강 해 놨겠지. 어딘지도 몰라 나는……. 먼저 애는 제대로나 보냈지. 이거는 아무 데나 버려두고."목구멍 풀칠하기도 바빠서 그때는 아무 것도 몰랐다. 어쩌면 다행이라고도 여겼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아들딸 구분 말고 둘 만 낳자' 같은 산아제한 슬로건이 쏟아지던 70년대 중반, 출산이 1이면 낙태가 2.57로 낙태가 산아제한의 방법으로 적극 권장되었다. 그 시절 무숙씨도 아이 둘을 낙태했다. 낙태를 하면서 '배꼽수술'도 같이 받았다. 남자들은 정관수술, 여자들은 '배꼽수술'이라는 불임수술을 강요받던 시절이었다. 서른넷의 무숙씨는 두 번째 낙태 수술을 하면서 배꼽수술을 서비스로 받았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지 이러고 살면 뭐하나 했어. 실밥도 안 뽑고 이틀만인가 화장품 장사를 나갔더니 지점장이 '이 아줌마가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하드라. 겁이 나는지 아픈지도 몰랐어."무숙씨는 일곱을 품어 다섯을 낳고 셋을 붙잡았다. 겨우 붙잡은 삼남매를 지키느라 아픈지도 설운지도 모르고 살았다. 가끔 '아이고 그것들이 다 살았으면 어떻게 키웠을까? 잘 죽었지.' 했다가 아이들이 다 크고 살림이 나아지자 '아유 그것들이 다 살았으면 얼마나 오부지고 좋았을까? 기집애들이 참 야무지고 이뻤는데…….' 무숙씨도 덤덤히 말했고 나는 그것을 그녀의 일이요 지난 기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감정이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