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 피해자 한일영씨 발, 선감학원에 있을때 동상에 걸려 발가락 세개 끝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이민선
살아서 집에 돌아가는 길은 탈출뿐이었다. 그러려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수영할 줄 몰랐다. 또한 '갑바'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의 눈도 피해야 했다. 서른 살쯤 된 사내인데 그가 하는 일은 운동해서 가슴 근육을 키우고 망원경 들고 산에 올라 막사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소년 한일영이 탈출을 결심한 것은 선감학원에 온 지 1년 뒤다. 그는 틈틈이 수영을 익혔고 갑바라는 사내의 망원경을 피할 방법도 연구했다. 바다에 도착하기 전에 거쳐야 하는 늪 같은 갯벌을 건너는 방법도 모색했다. 탈출했다가 실패해 되돌아온 아이들이 훌륭한 정보원이었다.
두려움에 탈출할 결심이 흐려진 적도 있다. 도망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처참한 시체를 보고는 탈출할 결심을 잠시 접기도 했다. 탈출에 실패해 붙잡혀 온 아이가 두들겨 맞는 것을 보고는 의지가 약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를 향한 그의 갈망이 죽음의 두려움보다 훨씬 더 강했다.
"누군가 떠밀려 왔다고 하면서 단체로 데려갔는데 따라가 보니 몸이 퉁퉁 불은 시체였어요. 물고기가 뜯어 먹었는지 살점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 얼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고. '어~휴' 그 처참함이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이런 식으로 겁을 주는 거죠. 도망치면 이 꼴이 된다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탈출을 감행한 것은 1974년 여름이다. 선감학원에 온 지 3년 만이고, 탈출을 결심·계획한 지 2년 만이다. 다행히 절친 2명이 그와 함께 하고 있어 외롭지는 않았다. 탈출은 낮에 감행했다. 깜깜한 밤에는 목적지인 어섬을 찾아 헤엄을 칠 수가 없어서다. 그들의 탈출 경로는 선감도 갯벌(200여 미터) ⇒ 바다(200여 미터) ⇒ 어섬(화성 송산면)이었다.
갯벌은 거북이처럼 포복해서 건넜다. 늪처럼 푹푹 빠지는 갯벌이라 걸어서 건너기가 불가능해서다. 걸어서 건너다가, 기력이 딸려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밀물에 휩싸여 죽은 아이도 있다는 것을 소년 한일영은 알고 있었다.
갯벌을 건너고 나니 바다가 그들의 앞을 막았다. 먼발치에서 보던 것보다 어섬은 훨씬 더 멀었다. 기가 질린 친구 하나는 '꼭 살아서 돌아가라'는 말을 눈물과 함께 남기고는 선감학원으로 되돌아갔다. 그 친구가 무사히 갯벌을 건너 돌아갔을지, 만약 돌아갔다면 선감학원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 4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알 수가 없다.
"바다에 뛰어드는 순간 '죽느냐 사느냐'가 시작되는 거예요. 무척 두려웠죠. 죽은 아이 시체를 실제로 봐서 두려움이 더 컸어요. 그래서 친구하고 서로 떨어져서 헤엄치기로 약속했어요. 헤엄치다 힘이 빠지면 옆 사람을 물귀신처럼 붙잡고 늘어질 수가 있거든요. 한 명이라도 살아야 하잖아요. 어섬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힘이 바닥나 발이 저절로 물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그때 무엇인가 발을 꽉 물었어요. 아마 게였을 거예요. 그 녀석이 제 생명의 은인이죠."게한테 발을 물린 소년 한일영은 깜짝 놀라 발을 디뎠다. 발에 무엇인가 밟혔다. 땅이었다. 땅을 딛고 서니 물이 가슴 부근에서 넘실거렸다. 게가 발을 물지 않았다면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기력이 다해 죽게 됐을지도 모른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돌아와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