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글판 대표 시인이 본 사람 풍경

[서평] 나태주 포토 에세이 <풍경이 풍경에게>

등록 2017.04.11 09:30수정 2017.04.1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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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이 가장 사랑한 광화문 글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를 쓴 시인 나태주는 이제 할아버지다. 자전거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카메라를 메고 다니며 옛 모습을 그리워하며 동네 지킴이를 자청하는 할아버지다. 43년간의 교직생활을 마치고 8년간 맡아왔던 공주문화원장직도 오는 6월이면 내려놓는다. 나태주 시인은 번거로운 광화문보다 시골 풍경이 어울리는 할아버지다.

 <풍경이 풍경에게> 겉표지
<풍경이 풍경에게> 겉표지푸른길
나태주 포토 에세이 <풍경이 풍경에게>는 풀꽃 시인이 2007년부터 십여 년간 찍은 공주의 정겨운 풍경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책머리에 인간도 풍경인지라 한 인간이 풍경에게 말을 건네고 이야기를 청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풍경과 풍경의 대화, 재미있고 넉넉함이 묻어나는 생각이다.


"언제나 풍경은 객관이고 인간은 주관이란 생각은 매우 위험스럽고 잘못된 것이며, 인간 중심의 옹졸한 소견머리에서 나오는 것이다."-5p.

시인의 눈길이 머물고 자전거가 서는 곳은 이야기보따리가 풀려나오는 곳이다. 길을 걷다 플라스틱 채반에 놓인 호박고지의 눈부신 속살도 이야기 소재가 되고, 볕바른 창가 싸리 채반 위에 썰어 말리는 감에선 아내의 마음을 길어낸다. 아파트 주차장을 배회하는 개, 줄에 묶인 개 한 마리의 외로움마저 살피는 시인의 심성이 빚어내는 이야기는 따뜻하고 옛 정이 묻어난다.

시인이 사는 공주는 예로부터 학생들이 많은 도시였다. 외지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많아서 교육도시라는 말이 붙었고, 시인은 고등학교 때 처음 공주와 인연을 맺었다. 그곳에서 한 여학생에게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고등학교 3년을 허송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시인이 되겠다는 평생소원 하나를 보탰다.

오늘날 나태주 시인을 있게 만든 공주는 도시 자체가 첫사랑이다. 시인은 학교 공부보다 공주 시내의 서점들을 돌면서 책을 보는 일에 재미를 붙이며 살았다. 그런 서점들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보는 시인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옛 풍경들이 사라지는 곳이 어디 공주뿐이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옛 풍경에 고마워하는 시인의 마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공주에는 서점이 많이 줄었다. 아예 고서점은 씨알도 없다. 오직 공주고등학교 앞에 고서점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이름하여 동양서점, 반갑다. 고맙다. 그 자리에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그대로 데리고 있어줘서." -31p.


오밀조밀하고 삶이 힘들고 고생스러웠음을 알려주는 공주의 많은 골목길에서 시인은 발길보다 먼저 마음이 달려간다고 했다. 골목길에 오기면 하면 후유 마음이 내려앉고 편안해졌단다.

제주에는 '짐 진 사람이 쉼팡 찾는다'는 속담이 있다. 쉼팡은 짐을 지고 가던 사람이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널찍하고 편평한 돌을 말한다. 시인에게 쉼팡은 골목길이었던 것이다. 가로등 불길이 흔들리는 골목길을 으슥하게 뭔가 사고가 일어날 것 같은 곳으로 여기는 도시인들은 시인의 정서가 부러울 법하다.


"마음도 휘어져서 간다. 뒤를 보면서 간다. 어서 오라고, 어서 따라오라고 손을 흔들며, 골목길에 오면 당신의 인생도 하나의 조그만 시냇물.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마나 더 가보자. 어디쯤 짐을 내려놓아도 좋은 그대의 자리가 있을 것이다." -35p.

할머니 개울가 오거리시장에 좌판을 벌린 할머니. 2008.4
할머니개울가 오거리시장에 좌판을 벌린 할머니. 2008.4푸른길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물 한 줄기에도 애틋한 눈길을 보내는 시인은 사람도 풍경이라 했다. 그 풍경 속에는 고개 너머 시골 마을에서 보퉁이에 채소를 담아서 들고 지팡이 짚고 절뚝이면서 시내버스 타고 와서 개울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도 있다. 시인은 그 할머니에게서 우리들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나 할머니의 수고와 정성을 본다. 시인은 할아버지가 됐어도 여전히 소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가 보다. 아, 얼마나 따뜻한 마음인가.

"오거리시장 가장 낮은 자리 채소 파는 할머니는 또 다른 나의 외할머니. 그분을 통해 나는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외할머니의 모습을 본다. 어찌 저분을 우리가 모르는 분이라고 우길 것인가." -43p.

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시인이 자연을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는 대목이 있었다. 공주사대 부설고등학교로 가는 거리에 있던 가로수에 대한 단상이다. 봄에도 좋고 가을에도 좋았던 거리에 가게를 내고 있는 주민들이 이를 마다하고 미워하여 깡그리 베어버린 것을 두고, 시인은 쓰린 마음을 이렇게 달랬다.

"이걸 어찌 하면 좋으랴. 사진 속에 남아 있는 풍경만으로 쓰린 마음을 달랠 수밖에는."-49p.

시인이 '공주의 명물 하나가 사라져버린' 모습을 보며 인도네시아에서 살 때 집주인 아저씨가 집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저씨는 수십 년이 넘었을 나뭇가지 하나가 서까래를 놓을 부위에 걸리자, 나무를 자르는 대신 처마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는 "저 나무가 먼저 있던 건데, 집짓는다고 함부로 쳐낼 수 있나" 하며 번거로움을 택했다. 덕택에 집 모양이 한결 여유롭고 멋스러워졌던 기억이 있다.

풍경을 객관으로만 보는 인간의 오만은 그런 여유 따위는 거추장스러웠나 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풍경이 천국 풍경이라도 손쉽게 그럴 수 있을까? "사람이 살아서 세상에서 천국을 살지 못한다면 이다음에 죽어서 천국에 가서 천국이 천국인 줄 모를 것이다"는 시인의 말은 사뭇 철학적이다.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가 "만일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 곳이 바로 '하늘'이다"라고 했던 말에 비추어 보면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요, 산증인인 오래된 나무를 소홀히 다루고 베어버리는 영혼은 사람의 아픔마저 손쉽게 외면할 것이다.

"지금 그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바로 천국의 풍경이다. 지금 그대 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바로 천국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대 또한 이미 천국의 사람인 것이다."-51p.

백범 김구 선생과 공주의 깊은 인연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뭉클하다. 김구 선생은 황해도에서 일본인 장교를 때려서 살해한 벌로 해주옥에서 고문당하고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되어 지내던 중 탈옥했다.

탈옥 후 전국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숨어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김구 선생이 광복 후 1946년 4월 27일 공주를 다시 찾았다. 충남 열한 개 군에서 10여 만 동포가 선생을 환영하는 길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선생은 칠부바지 차림으로 내의도 입지 않은 채였다고 한다. 또 선생은 노인들이 인사를 하면 자동차 안에 앉아서 인사를 받지 못하는 성미라서 언제든 자동차에서 내려 인사를 했는데, 그날은 아예 공주의 전막이란 데서부터 자동차에서 내려 환영객들과 함께 금강대교를 걸어서 시내로 들어오셨다 한다." -58p.

김구 선생은 마곡사 뜨락에 무궁화와 향나무 한 그루씩을 심은 뒤 매헌 윤봉길 의사 가족들을 만나러 예산으로 향하였다. 선생은 우리에게도 정이 넘치는 마음 따뜻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치인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하겠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많은 정치의 계절에 김구 선생이 공주와 맺은 인연이 애틋하게 다가옴은 선생의 인간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존경할 만한 위대한 지도자를 이 시대는 원한다.

책 중간 중간 심금을 울리는 시인의 절창은 한눈에 훑고 지나는 자기개발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미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그 중에 '강물과 나는' 시인의 어린 아이 같은 맑은 심성이 잘 드러나는 시다.

인간도 한 풍경이라는 생태적인 너무나 생태적인 풀꽃 시인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자. 굳이 번잡한 광화문에 있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 시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
바가지로
강물에 비친
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
흰 구름 한 송이
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

한참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기르다가 공연스레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강가로 나아가
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

물고기와 흰 구름과
새소리 모두
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날부터
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117p.

풍경이 풍경에게

나태주 지음,
푸른길, 2017


#나태주 #풀꽃 #풍경 #공주 #포토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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