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개울가 오거리시장에 좌판을 벌린 할머니. 2008.4
푸른길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물 한 줄기에도 애틋한 눈길을 보내는 시인은 사람도 풍경이라 했다. 그 풍경 속에는 고개 너머 시골 마을에서 보퉁이에 채소를 담아서 들고 지팡이 짚고 절뚝이면서 시내버스 타고 와서 개울가 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도 있다. 시인은 그 할머니에게서 우리들 어머니,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나 할머니의 수고와 정성을 본다. 시인은 할아버지가 됐어도 여전히 소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가 보다. 아, 얼마나 따뜻한 마음인가.
"오거리시장 가장 낮은 자리 채소 파는 할머니는 또 다른 나의 외할머니. 그분을 통해 나는 이미 세상에 안 계신 외할머니의 모습을 본다. 어찌 저분을 우리가 모르는 분이라고 우길 것인가." -43p.책을 읽으며 무엇보다 시인이 자연을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는 대목이 있었다. 공주사대 부설고등학교로 가는 거리에 있던 가로수에 대한 단상이다. 봄에도 좋고 가을에도 좋았던 거리에 가게를 내고 있는 주민들이 이를 마다하고 미워하여 깡그리 베어버린 것을 두고, 시인은 쓰린 마음을 이렇게 달랬다.
"이걸 어찌 하면 좋으랴. 사진 속에 남아 있는 풍경만으로 쓰린 마음을 달랠 수밖에는."-49p.시인이 '공주의 명물 하나가 사라져버린' 모습을 보며 인도네시아에서 살 때 집주인 아저씨가 집짓던 모습이 떠올랐다. 아저씨는 수십 년이 넘었을 나뭇가지 하나가 서까래를 놓을 부위에 걸리자, 나무를 자르는 대신 처마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는 "저 나무가 먼저 있던 건데, 집짓는다고 함부로 쳐낼 수 있나" 하며 번거로움을 택했다. 덕택에 집 모양이 한결 여유롭고 멋스러워졌던 기억이 있다.
풍경을 객관으로만 보는 인간의 오만은 그런 여유 따위는 거추장스러웠나 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풍경이 천국 풍경이라도 손쉽게 그럴 수 있을까? "사람이 살아서 세상에서 천국을 살지 못한다면 이다음에 죽어서 천국에 가서 천국이 천국인 줄 모를 것이다"는 시인의 말은 사뭇 철학적이다.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가 "만일 우리가 어느 곳에서든지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 곳이 바로 '하늘'이다"라고 했던 말에 비추어 보면 신학적이기까지 하다. 역사요, 산증인인 오래된 나무를 소홀히 다루고 베어버리는 영혼은 사람의 아픔마저 손쉽게 외면할 것이다.
"지금 그대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바로 천국의 풍경이다. 지금 그대 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바로 천국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대 또한 이미 천국의 사람인 것이다."-51p.백범 김구 선생과 공주의 깊은 인연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가슴이 뭉클하다. 김구 선생은 황해도에서 일본인 장교를 때려서 살해한 벌로 해주옥에서 고문당하고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되어 지내던 중 탈옥했다.
탈옥 후 전국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숨어 지낸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 김구 선생이 광복 후 1946년 4월 27일 공주를 다시 찾았다. 충남 열한 개 군에서 10여 만 동포가 선생을 환영하는 길거리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도 선생은 칠부바지 차림으로 내의도 입지 않은 채였다고 한다. 또 선생은 노인들이 인사를 하면 자동차 안에 앉아서 인사를 받지 못하는 성미라서 언제든 자동차에서 내려 인사를 했는데, 그날은 아예 공주의 전막이란 데서부터 자동차에서 내려 환영객들과 함께 금강대교를 걸어서 시내로 들어오셨다 한다." -58p.김구 선생은 마곡사 뜨락에 무궁화와 향나무 한 그루씩을 심은 뒤 매헌 윤봉길 의사 가족들을 만나러 예산으로 향하였다. 선생은 우리에게도 정이 넘치는 마음 따뜻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정치인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를 하겠다고 날뛰는 사람들이 많은 정치의 계절에 김구 선생이 공주와 맺은 인연이 애틋하게 다가옴은 선생의 인간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존경할 만한 위대한 지도자를 이 시대는 원한다.
책 중간 중간 심금을 울리는 시인의 절창은 한눈에 훑고 지나는 자기개발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재미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르다. 그 중에 '강물과 나는' 시인의 어린 아이 같은 맑은 심성이 잘 드러나는 시다.
인간도 한 풍경이라는 생태적인 너무나 생태적인 풀꽃 시인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 보자. 굳이 번잡한 광화문에 있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 시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바가지로강물에 비친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물고기 몇 마리흰 구름 한 송이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한참동안 그것들을가지고 돌아오다가생각해보니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이것들을기르다가 공연스레죽이기라도 하면어떻게 하나나는 걸음을 돌려다시 강가로 나아가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물고기와 흰 구름과새소리 모두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그 날부터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117p.
풍경이 풍경에게
나태주 지음,
푸른길,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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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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