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김밥을 좋아하는 지아를 위해 선이는 엄마에게 오이김밥을 해달라고 조른다.
(주)엣나인필름
어머니는 김밥집을 하고 아버지는 야근이 잦은 공장에서 일하는 선이네, 선이와 윤이는 힘을 합쳐 저녁으로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지아에게 대접한다.
"누나부터 먹어 누나가 손님이니까.""와 대박 이거 진짜 맛있어. 근데 이거 어떻게 만드는 거야?""어 먼저 햄이 안 넣고, 김치부터 넣고, 햄 그리고 밥. 그리고 그 담에 김치 넣고... 그 담에 섞어! 간단해."발음도 부정확한 꼬맹이 윤이가 이렇게 설명을 잘 하는 비결은 직접 김치 볶음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화 상에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감독은 촬영 하기 전 아이들끼리 직접 김치볶음밥을 만들어 먹도록 했으며 윤이의 대사는 암기가 아닌, 자신의 경험을 되짚어 얘기한 것이다. 이 영화가 억지스럽지 않게 미묘한 아이들의 감정과 세계를 재현해 낸 비밀이 여기에 있다.
감독은 촬영 전, 아역 배우들에게 갖가지 상황극을 주고 "너가 이 상황이면 어떨 것 같아?"를 물은 뒤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고 말하게 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콘티를 완성하고 실제 촬영도 그런 식으로 진행하였다. 영화 속 아이들의 모든 대사도, 딱 한 대사만 빼고 아이들의 입에서 직접 나온 것이라고 한다.
"있잖아 사실 우리 부모님, 나 1학년 때 이혼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이혼한 줄 몰랐어 웃기지.""아니야.""그래도 아빠랑 오래 살 줄 알았는데... 맨 처음에 엄마랑 살 때가 제일 좋았는데.""그러면 엄마랑 살겠다고 하면 안돼?""어떻게 그래, 그리고 우리 할머니는 엄마 얘기만 꺼내며 신경질내시거든.""진짜? 우리 아빠도 그러는데 우리 아빠도 할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짜증내고 술만 마셔.""그래? 어른들은 왜 이러냐.""그러니까.""나 사실 우리 엄마 본 지 오래 됐다. 이번에 꼭 바다 같이 가기로 했는데.""진짜? 우리도 바다가기로 했었는데.""진짜?""응. 지아야 우리 나중에 우리 둘만 바닷가 같이 갈래?"그러게 어른들은 정말 왜 그럴까? 이해할 수 없는 어른과는 달리 마음이 통하는 친구와의 약속은 얼마나 소중하고 설레는지. 그러나 이 약속은 너무 쉽게 깨져버리는 허약한 약속이기도 하다. 틀어지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며 보낸 둘의 여름 방학이 끝나가고, 지아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긴다. 그것도 선이를 따돌리는 친구들이다. 지아는 선이보다 잘 나가고 재미있는 친구 무리와 지내기 위해 그들이 무시하는 선이를 애써 무시한다.
"지아야 너 생일파티 안 하다며, 숙제해야 한다며."지아의 생일날, 선이는 처음으로 엄마의 돈을 훔쳐 비싼 선물을 사들고 설레는 마음에 지아의 집으로 달음박질한다. 하지만 선물을 풀어 보지도 않고 돌려 보내는 지아, 선이만 따돌리고 다른 친구들과 생일파티를 하는 지아를 선이는 이해할 수가 없다. 그동안 지아가 애써 외면하고 무시해도 끝끝내 다시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던 선이는 세상을 잃은 듯한 모습이다. 무엇을 해도 재미가 없고 학교 가는 날이 기대되지도 않고 도대체 세상이 살 만하다고 느껴지지가 않는다.
아이들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못난 어른들은 아이들을 힘들게만 하고 아이들끼리 맺는 관계의 세계는 때론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도, 어떤 처세의 기술도 익히기 전이기에 더 당혹스럽고 고되다. 선이 뿐 아니다, 지아도 마찬가지다. 지아는 공부를 잘 한다는 이유로 함께 놀던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하고 선이와 지아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오해만 커져간다. 그렇게 바다를 보고 싶어하던, 지아와 함께 바다를 보고 싶어하던 선이는 할아버지의 장례식날에야 바다에 간다. 쓸쓸한 아버지의 뒷 모습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선이가 기대하던 그 바다가 아니다. 선이는 세상이 자신의 희망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선이는 맨날 친구에게 맞은 채로 돌아오는 윤이가, 그런데도 같은 친구와 계속 노는 윤이가 속상하고 답답하다.
"이번에는 나도 때렸어.""그래서 그 다음엔.""연오가 또 때렸어." "그래서?""그래서 같이 놀았어.""야 이윤 너 바보야? 그리고 같이 놀면 어떡해!!""그럼 어떡해.""다시 때렸어야지.""또?""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그럼 언제 놀아, 연오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오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는 그냥 놀고 싶은데."보는 이들의 마음을 찔러버린 어린 연오의 대사, 그 말을 듣고 선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선이의 약지 손톱에는 지아와 나눈 여름의 봉숭아 물이 아직 얇게 남아있다. 그 봉숭아 물이 다 없어지기 전에, 너와 나는 다시 우리가 될 수 있을까? 처음이기에 모든 것이 설레고 당혹스러웠던 그 여름의 우리들.
[씨네밥상 레시피] <우리들> 속 오이김밥 (김밥 4줄 분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