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의 왕비> 포스터.
KBS
KBS의 새로운 사극 <7일의 왕비>는 단경왕후 신씨에 대한 드라마다. 신씨는 연산군이 쫓겨난 뒤 쿠데타 세력의 추대로 왕이 된 중종의 조강지처다.
신씨를 왕비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단경왕후라는 타이틀이 붙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단 하루도 왕비로 살았던 적이 없다. 단 하루도 왕비가 아니었다.
연산군을 몰아낸 쿠데타인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남편(19세)이 왕이 되던 날, 신씨(20세)도 남편을 따라 궁에 들어갔다. 음력으로 중종 1년 9월 2일, 양력으론 1506년 9월 18일이었다. 궁에 들어가는 순간만 해도, 신씨는 곧바로 왕비 책봉식을 거쳐 왕비가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대번에 친인척 관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래서 신씨는 퇴출 압박을 받게 되었다.
신씨는 연산군의 처조카였다. 연산군이 고모부였던 것이다. 그의 고모, 그러니까 연산군의 왕비인 신씨는 그의 아버지인 신수근의 여동생이었다. 연산군의 처남인 아버지 신수근은 단순히 왕의 인척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은 연산군 정권의 실세 중 하나였다.
중종반정 직전에 신수근은 쿠데타에 함께하자는 제안까지 받았다. 신수근은 그 제안을 뿌리쳤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신수근은 연산군이 실패한 왕이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세자께서 총명하시니 그분을 믿을 뿐이오"라며 연산군 정권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이렇게 연산군과 친인척 관계로 맺어져 있고 아버지 신수근이 그 정권의 실세인 데에다 쿠데타 주역들의 협조 요청까지 거부했으니, 단경왕후가 쿠데타 주역들의 눈총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왕비는 단순히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다우리 시대에는, 대통령의 여자 배우자는 당연히 대통령 부인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 사람들은 옛날 왕의 부인도 당연히 왕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옛날 사람들한테는 왕비 책봉식을 거친 사람이 왕비였다. 우리 시대에는, 대통령의 취임식은 있어도 대통령 부인의 취임식은 없다. 하지만 왕비의 경우에는, 취임식인 책봉식이 있어야 했다. 왕비는 단순히 왕의 배우자가 아니라 왕과 나란히 세상을 이끄는 국모였다. 이렇게 왕비 역시 독립적 지위를 가졌기 때문에, 왕비에 대해서도 별도의 취임식을 요구했던 것이다.
신씨는 입궁 뒤에 곧바로 퇴출 압력에 시달렸다. 그래서 책봉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는 그렇게 가시방석에 앉아 있다가 7일 만인 양력 9월 25일 궁에서 쫓겨나, 세조(수양대군)의 사위인 정현조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중종 1년 9월 9일 자(1506년 9월 25일) <중종실록>에 따르면, 20명 가까운 쿠데타 주역들이 다소 중립적인 영의정 유순을 앞세워 중종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쿠데타 주역들은 유순의 입을 빌려 "신수근의 딸이 중전이 되면 민심이 불안해지니, 사사로운 정을 끊고 밖으로 내치소서"라고 압박했다. 중종이 "말씀하시는 바는 맞습니다만, 그래도 조강지처인데 어쩌겠습니까?"라고 회피하자, 이들은 "신들도 이해는 합니다만, 나라를 위한 큰 틀에서 보면 어쩔 수 없습니다"라며 "머뭇거리지 마시고 속히 결단하소서"라고 재촉했다. 결국, 중종이 물러섰다. 그 날 신씨는 그렇게 이혼당하고 궁에서 쫓겨났다.
중종은 쿠데타 과정에 참여하지 않은 상태에서 왕으로 추대된 탓에 아무 힘도 없었다. 그냥 허수아비였다. 그래서 부인을 붙들어둘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생이별을 했다. 1499년에 결혼했으니 결혼 8년 차 되는 해에 가정이 파탄된 것이다.
인왕산 바위에 치마 널었던 사연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신씨는 그 뒤 정현조의 집을 포함한 궁궐 주변의 집들을 옮겨 다니며 거주하면서 '1인 시위'를 자주 벌였다. 경복궁에서 잘 보이는 인왕산 바위에 치마를 널어놓는 방식이었다.
이 일로 그 바위는 치마바위로 불렸다. 남편에게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메시지를 전함과 동시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처지를 호소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신씨의 1인 시위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재야의 개혁파 선비들을 중심으로 동정론이 확산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