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형 시인 4주기 추모시 낭송회 추모 행사에 함께 한 이들이 기념 사진을 찍었다.
이명옥
모자 아래로 하얀 백발을 갈기처럼 휘날리며 혁혁한 눈매로 누런 서류 봉투에서 당신의 시를 꺼내 나눠주시던 분이 있었다. 산장, 기독교 회관 등 행사장마다 어김없이 나타나 봉투에서 시를 꺼내어 나눠주었다. 노옹은 자신을 '통일 시를 쓰는 사람'이라 했다. 그가 통일 시인 이기형 선생이다.
통일 시인 이기형 선생이 날아서라도 가겠다는 고향, 어머니와 가족 품으로 돌아가신 지 올해로 4년째다. '통일시인 이기형 기념 사업회'가 지난 12일 서울 종로 천도교 수운회관에서 마련한 '4주기 추모 시낭송회'는 시인 탄생 100주기에 마련된 자리라 더 남달랐다.
몽양 여운형 선생을 모시던 선생이기에 이부영 몽양 여운형 선생 기념 사업회 회장, 임헌영 문학평론가,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 민영 시인, 정동익 사월 혁명회 회장 등이 추도사를 하며 이기형 선생의 통일 정신을 기리고 시 세계를 소개했다.
4월 혁명회 정동익 회장은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적폐는 분단 적폐다. 분단에서 수많은 적폐가 시작됐다"며 "분단 적폐를 청산하고 통일 세상을 이루는데 마음을 함께 하자"고 호소했다.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시가 많이 읽히지 않는 세대지만 시를 많이 읽어야 평화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기형 시인은 삶 전체가 분단극복과 통일을 향한 항거며 몸부림이었다. 맹문재 시인의 시 '전위의 시인 이기형 선생님께'에 선생의 삶의 궤적이 담겨 있다.
전위의 시인 이기형 선생님께/맹문재 몽양(夢陽)의 서거 후 삼십년간 칩거했다가전위대로 나섰지요분단 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생이별한 어머니와 처자식을 품기 위해서였지요아버님의 퉁소 소리와함흥의 꽃섬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지요진리와 신념 앞에서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 스승을 섬기기 위해서였지요단심(丹心)의 시인은 거칠 것이 없었지요함흥에서의 야학으로일본에서의 고학으로항일 투쟁으로 쌓은 강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민주화 운동이며통일 운동을아름다운 산하에 펼치려고 했기 때문이지요/일부
선생은 북에 어머니, 아내와 딸이 있으며 이별한 지 60년 만에 북에 있는 딸을 만나 보았다. 20세에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 청년지도자로 민족해방 민주조국의 꿈을 키웠다. 몽양 암살 이후 '분단 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33년간 절필하고 칩거했다. 통일을 위한 무기로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치열하게 통일의 열망을 노래하다 96세로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