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견 등 경주 일원 선비들이 문천에서 회동을 하며 전쟁 발발 기운이 높은 시국을 걱정하고 토론할 때 바닷가에 거주하는 선비들은 공암 일대에 모여 의기를 다지며 나라를 지킬 각오를 다졌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를 이루는 공암 일원(사진)에서는 의병들과 일본군 사이에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정만진
양동마을 수졸당 주인 이의잠의 『동호일고』 등 경주 지역 의병장들의 문집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난 해(1592년) '봄에 김석견, 손시, 권사악, 최봉천, 백이소, 이의잠, 이준, 이눌(김석견의 사위), 김윤복, 황희안 등은 남천 문옹정(김석견의 정자)에서 시국을 의논했다.' 그 무렵 동해안에 거주하는 김득복, 박춘영, 박인국, 황희안, 김응택, 김몽택 등은 바닷가 공암(孔岩)에 모여 단합을 도모했다. 지식인들은 이미 전쟁 발발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5월 16일 명활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첫 전투를 치른 김석견은 7월의 영천성 수복전, 9월의 경주성 수복전에 참전했고, 그 외 유포 전투, 휴항퇴 전투 등을 치르며 1592년을 보냈다. 그 후 김석견은 조선 정부를 배제한 채 명과 일본 두 나라가 강화 회담을 진행한 1594∼1596년이 지나갈 무렵인 1596년 9월 팔공산 회맹에 사위 이눌(李訥)과 아들을 참가시켰다. 일본이 재차 전쟁(정유재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이에 대비하기 위해 의병장들이 회동을 한 것이 팔공산 회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