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동부 도시에 흉가처럼 버려진 공장 앞으로 자동차가 지나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은 세계화의 비극적 결말이었다. 2017년 1월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식 반세계화주의가 '다보스의 뺨을 후려쳤다'고 보도했다. 다보스가 지속적으로 주장해 온 '탈규제'와 '자본과 노동의 세계화'가 세계화의 종주국인 미국 중산층을 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고, 트럼프는 이들의 분노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
강인규
일관되다고 해야 할지,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다보스의 새 논리는 전혀 새롭지 않다. 기술 발전을 '거부할 수 없는 흐름'으로 묘사하며 규제탈피를 요구하는 수법은 이미 지난 세기의 '미래학자'들이 지겹게 써먹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1995년에 출간된 <디지털이다(Being Digital)>라는 책을 보자. 매사추세츠 공대(MIT)의 미디어랩 설립자이자, 저명한 미래학자인 니콜라스 네그로폰테가 쓴 책이다. 당시 전세계를 휩쓴 이 책의 인기와 영향력은 슈밥의 <4차산업혁명>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네그로폰테는 이 책에서 '아톰(원자)'과 '비트'의 융합을 이야기한다. 현실세계에서 물질과 디지털 신호는 더 이상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 '기술 혁명'을 신나게 이야기 한 뒤, (언론 독과점을 막기 위해 마련된) '신문-방송 겸영 금지'라는 정부 규제가 얼마나 한심한 짓인지를 토로하기 시작한다.
'신문'과 '방송'이 디지털 신호 '비트(bit)'로 통합되고 있기 때문에, '신문'과 '방송'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매체의 경계가 사라지는 융합의 시대에 '신문-방송 겸영 금지'라는 낡은 제도는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 책이 나온 지 20년도 넘었지만, 신문과 방송은 여전히 별개의 매체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책이 나온 뒤 얼마 후에 미국의 신문방송 겸영 금지법은 대폭 완화되었고 안 그래도 위축되어 있던 언론의 다양성은 더욱 심각하게 위축되었다.
그 사이 언론재벌이 소유한 보수 뉴스채널 '폭스뉴스'는 시앤앤(CNN)'을 제치고 가장 영향력 있는 뉴스매체가 되었다. 이 방송은 미국을 이라크 전쟁과 트럼프 시대로 끌어들이는 데 주역을 담당했다. 공교롭게도 <디지털이다>에 뜨거운 찬사를 담은 추천사를 써 준 이는 폭스뉴스의 소유주 루퍼트 머독이었다.
네그로폰테가 <디지털이다>를 쓴 배경에는 인터넷이라는 신기술이 있었다. 1994년 겨울에 그래픽 기반 웹브라우저 '넷스케이프 네비게이터'가 무료로 공개됨으로써 인터넷 대중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터넷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수많은 예언을 남겼는데, 그중 하나가 '민족주의의 종말'이었다.
"앞으로 20년 후, 아이들은 '민족주의'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모르게 될 것이다." 그는 1997년에 이렇게 선언했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으로 다른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민족주의는 사라질 수밖에 없는 팔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20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코노미스트>지는 "사이버 민족주의: 인터넷 혐오의 신세계"라는 기사에서 인터넷이 극단적 민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고 한탄했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미래학자들의 왜곡된 예언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없다. 사람들은 쉽게 잊고, 이미 벌어진 일은 쉽게 체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4차산업혁명' 예언을 순순히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적 변화는 스스로 진행하는 절대적 힘도, 가치 중립적인 진화의 과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음 글을 통해 '기술 혁신'이 어떻게 재계의 탐욕이나 정치권의 이해관계와 결탁되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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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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