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론조사의 구조국민 대표단의 1박2일 토론이 공론조사(Deliberative Polling)의 핵심입니다.
장용창
공론조사의 구조는 <그림>과 같습니다. 복잡하게 보이지만 사실 간단합니다. 정책 결정권자인 대통령 등이 공론조사를 하자고 제안하고는 주제를 정합니다. 그러면 실무적인 진행을 공론화 위원회에서 맡아서 하는데요, 먼저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일반적인 설문 조사를 합니다. (물론 국민 전체라 하더라도 표본 추출을 합니다.)
(1) 전후 설문에 의한 태도 변화의 측정 그 다음 토론에 참가할 국민 대표단을 뽑아서 1박 2일간 숙의 토론을 합니다. 여기서 토론 이전과 이후에 동일한 설문을 해서 참가자들이 토론의 결과 그 문제에 대한 태도가 변했는지를 측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데요, 앞서 숙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지혜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말씀 드렸죠? 인간이 이성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왜곡되지 않은 과학적 정보를 들으면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는 것이죠. 또한 토론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다른 참가자들의 의견을 들으면서도 배우게 됩니다. 특히 5명~10명으로 구성된 조별 토론을 할 때 이런 배움이 가장 잘 일어난다고 합니다(Gastil & Levine, 2005).
(2) 사회적 학습 이런 배움을 사회적 학습이라고 합니다. 일방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 속에서 서로 참가자들끼리 배우기 때문에 사회적 학습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사회적 학습이 일어난다는 점이 일반적인 설문과 공론조사의 핵심적인 차이점입니다. 여러분들도 일반 설문을 받아볼 때 황당하거나 화가 난 적이 있지 않나요? 설문 문항이 뭔가 조작된 결론으로 향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혹은 내용을 잘 모르는데 자꾸 답을 하라고 해서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공론 조사에선, 잘 모르는 내용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거나 발표자들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토론 이후에 동일한 설문을 해보면 참가자들의 태도가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변합니다. 이것은 토론의 효과가 있었다는 뜻이죠. 공론조사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이 사회적 학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 정책 결정은 국민 대표단이 아니라 정책 결정권자가 한다 국민 대표단에 의한 1박 2일간의 토론이 끝나면 공론화 위원회가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정책 결정권자에게 제출합니다. 그러면 정책 결정권자는 국민 대표단의 의견을 보고 정책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번에 정부가 발표할 때 약간의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법률에 의해서 발전소 건설을 중단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대통령입니다.
그런데, 마치 공론조사 그 자체에 의해 결정하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자면, 공론조사에 참여한 국민 대표단은 자신들의 의견을 설문 조사로 나타낼 뿐이고, 그 의견을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대통령 자신입니다. 그런데도 이번에 국무조정실에서 발표할 때 표현을 잘못 했는지, 아니면 언론이 일부러 오해를 했는지, 마치 국민 대표단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도한 언론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여론 재판'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더군요.
국민 대표단이 최종 정책까지 결정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토론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든 숙의 민주주의 토론에선 인간이 가진 이성과 지혜가 발휘됩니다. 특히 이때 이성을 '공적 이성(Public Reason)'이라고 합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경제주체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적 이성(private reason)만을 발휘하는 반면, 숙의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국민 대표단은 공적 이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즉, '어떤 정책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가 아니라, '어떤 정책이 우리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국민 대표단의 결정에 완전히 정책을 맡겨 버린다면 국민 대표단은 오히려 찬반 양측의 로비 압력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대통령 등 책임 있는 공직자가 나서서 '결정은 제가 하고, 책임도 제가 집니다. 국민 여러분은 지혜만 모아 주십시요.'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국민들의 공적 이성이 더 잘 발휘됩니다.
(4) 방송 보도의 중요성 공론조사에서 텔레비전 방송 보도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 공론조사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국민들도 토론의 과정과 결과를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공론조사에선 공적 이성이 발휘되며, 사회적 학습을 통해 태도가 변합니다. 방송 보도를 해주면 토론에 참가하지 않은 국민들도 간접적으로 이런 사회적 학습의 기회를 얻게 됩니다.
토론 과정에 대해서는 글자로 된 정보를 나르는 신문보다 동영상으로 된 정보를 나르는 방송사가 더 효과적입니다. 그 동안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인터넷 상에서 진행한 적도 있지만, 토론으로 인한 태도 변화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얼굴을 마주보면서 이야기해야 종합적인 정보를 교환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숙의 민주주의 토론을 많이 했던 다른 나라들에선 처음 토론을 기획할 때부터 방송사가 주최 기관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아예 방송사가 주최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Gastil & Levine, 2005). 또한 토론 과정을 방송으로 내보내면, 그 동안 전문가들이 밀실에서 비밀리에 정책을 결정해버리던 관행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난번 촛불집회 때 오마이뉴스가 생방송을 해줘서 저는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요, 이번 신고리 5,6호기 원자력 발전소 관련 공론조사를 할 때도 오마이뉴스가 토론 과정을 생방송으로 내보내주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4. 공론조사와 합의 회의(Consensus Conference)의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