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책 표지
이학사
영화 속에서 배우 최희서가 분한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의 연인이기 전에 그 스스로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적 통치를 거부하며 아나키즘을 실현하고자 하는 여성 아나키스트로 등장한다. 박열 못지않게, 아니 때론 박열보다 더 의연하고 당돌한 태도로 옥중투쟁을 벌이는 그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으리라.
더욱이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묘한 신비감마저 불러일으킨다. 그에게 따라붙는 '일본인', '여성', '아나키스트'라는 수식어는 우리가 배워온 역사 속에서도 소수 혹은 약자를 상징하는 키워드들이다.
그런 탓에 우리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가네코가 자리 잡을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 <박열>을 통해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역사적 인물로 대중들에게 성큼 다가섰다.
다행히 가네코는 생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한 옥중수기를 남겼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책은 가네코 자신이 아나키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회상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다(영화 속에서 가네코가 열심히 집필하는 원고가 바로 이 수기다).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사람은 자라면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 큰 영향을 받는다. 가네코 역시 처음부터 세상에 불만을 가진 채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아나키스트로 만든 것은 불행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됐다.
가네코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이모와 눈이 맞아 새 살림을 차렸고, 어머니 역시 여러 남자의 품을 전전하던 끝에 가네코를 친정에 맡겨버린 채 멀리 떠나버렸다.
가네코가 세상에 나와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가족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식마저 내팽개쳐버린 부모의 무책임한 모습이었다. 가네코의 무의식 속에서 자라난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증오심은 바로 불행했던 부모와의 관계에서 형성됐던 셈이다.
"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목청껏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다. 특히 세상의 아버지들이나 엄마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다. '당신들은 정말 아이를 사랑하나요? 당신들의 사랑은 본능적인 모성애가 있을 때만 사랑이고 그 다음은 완전히 당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아이를 사랑하는 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하고." - p.769살 무렵 "호강을 시켜주겠다"는 친할머니의 말만 믿고 따라나선 조선행은 그에게 또 다른 불행의 시작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