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 시릿하게 애달픈 마음을 맥주로 달래며 단숨에 읽었다.
산지니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배우 최희서. 배역을 맡고 나서 먼저 이 책부터 보았단다.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 무덤에 찾아가 인사도 드렸다고 한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가네코 후미코, 아니 최희서가 보았다는 바로 이 책 <나는 나>.
옥중 수기지만 자서전과 다름없다. 태어나서부터 박열과 만나는 순간까지 살아온 시간들이, 그 끈적이게 아픈 흔적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1903년에 태어났으니 한참 옛날이다.
일본 여자 가네코 후미코가 조선 남자 박열과 함께 일본에 맞서는 반제국주의 운동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 때문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면, 지독하게 어렵고 힘들던 그 시간들은 어쩌면 우리 어머니들의 어머니들도 겪었을 법한 가슴 아픈 개인사로만 여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난했고 지금도 가난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을 가진 자로부터 혹사당하고 괴롭힘을 받았으며 들볶였고 억압당했다. 또한 자유를 빼앗겼으며 착취당하고 지배당했다. 이런 나는 힘을 가진 자들에 대해 항상 마음속 깊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 내 마음속에 타오르고 있던 반항심과 동정심은 순식간에 사회주의 사상에 의해 불이 붙어버렸다. 아아, 나는 우리와 같은 불쌍한 계급을 위해, 나의 모든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투쟁하고 싶다."_300쪽'무국적자'라는 말보다 더 낯선 '무적자'로,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가네코 후미코가 살아온 시간들은 그이를 역사의 수레바퀴에 올려놓았다. 사회주의를, 반제국주의를, 아나키즘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 밑거름이 되어버렸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하고만 싶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으나 무엇을 해야 할지, 하고 싶은지 갈피를 잡을 수 없던 가네코 후미코. 어느 날 우연히 박열이 쓴 시를 보았다.
"참으로 강한 힘이 느껴지는 시였다. 구절, 구절 읽을 때마다 마음이 떨려왔다. 끝까지 읽고 나서는 황홀경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내 가슴속 피는 춤을 추었고, 알 수 없는 어떤 진한 감동이 나의 모든 생명을 고양시켰다."_324저 문장을 눈으로 따라가는데, 그때 그 순간 가네코 후미코의 감정이, 그 환희가 꼭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다. 그 느낌, 그 감동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에 푹 빠져든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한테 먼저 만나자는 이야기를 건넸고 다행히(?) 박열이 받아들이면서 둘의 만남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옥중 수기도 마무리 된다. 박열에 대한 글은 더는 다룰 수 없었다고 한다. 옥중에서 쓴 것이었으니 그랬을 테지.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학교를 졸업하면 곧바로 우리 함께합시다.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결코 당신을 병으로 힘들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죽는다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_343쪽가네코 후미코가 박열과 헤어지던 어느 날, 마음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렸다는 저 간절한 외침을 끝으로 옥중 수기도 끝이 난다. 아, 서럽다. 함께 살고 함께 죽자고 했던 이는 왜 먼저 목을 매야만 했을까. 박열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살아 있었다는데(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도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