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으로 불려진 여성 살인사건, 50년간 200여 명

스웨덴 추리소설 <린다 살인 사건의 린다> 통해 본 언론의 선정성

등록 2017.07.17 10:15수정 2017.07.1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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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같은 이름을 반복하고 있는 <린다 살인 사건의 린다>(1, 2권)는 스웨덴 범죄학자이자 소설가인 레이프 페르손의 장편소설이다. 1977년 정치계 인사와 성매매 업소가 얽힌 스캔들을 고발했다가 경찰위원회에서 파면된 그는 전공을 살려 경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범죄소설가로 자리매김했다.

책표지 <린다 살인사건의 린다> 레이프 페르손 지음, 이유진 옮김.
책표지<린다 살인사건의 린다> 레이프 페르손 지음, 이유진 옮김.엘릭시르
<린다 살인 사건의 린다>는 스웨덴의 오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속 경찰들이 갖고 있는 마초 문화와 이민자에 대한 극한 반감, 언론의 선정성이 여과 없이 드러나는 작품의 배경이 복지국가로 이름 높은 스웨덴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경찰대 재학생이자 수습 경찰관인 스무 살 여성 린다는 목이 졸리고 양손이 묶인 채 사망했다. 사건 현장에는 범인의 속옷, 운동화와 함께 DNA까지 남아 있었다. 미국 드라마 CSI에서라면 몇 시간 만에 해결될 사건이었다.

하지만 범죄수사국은 1천 명 가까운 사람의 DNA를 채증하지만 범인은 오리무중이다. 그 와중에 언론은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소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들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복수에 나선 기자들은 편집장이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마리안 그로스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기사의 주인공인 서른아홉 살의 사서 마리안 그로스의 큼직한 사진을 곁들인 양면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174쪽(1권)

용의자가 잡히자 언론은 "경찰관, 성폭행 후 살해", "젊은 여경 살인 사건... 성폭해와 고문 후 목 졸려 숨져" 등의 자극적인 헤드라인과 사진으로 진실을 왜곡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마흔여섯 살인 용의자는 서른아홉 살로 바뀌고, 목격자가 한밤중에 개들이 짖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는 말은 '연쇄살인범을 놀라게 해 도망치게 한 시민'으로 각색된다. 회사가 바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과잉 충성으로 지면을 채우는 영혼 없는 기자들이라니, 스웨덴이라고 별 거 없구나 하는 말이 바로 나올 법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수사를 하는 스웨덴 경찰을 보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경찰에서 오랜 세월 심리 치료 전문가로 일한 루가 주인공 벡스트룀과 이야기하며 진단한 스웨덴 경찰 문화에서 엿볼 수 있다.


"남성우월주의, 지속적인 존재 부인, 침묵과 파괴적 행동 양상, 이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오래전부터 경찰의 노동환경을 지배해오고 있으며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마비시켰다. 그녀조차 주 경찰청사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이 모든 것들이 건물 바닥과 벽, 천장에서 자신을 향해 밀려온다고 느꼈다고 했다." -150쪽(1권)

루가 진단한 대로 범죄수사국 소속 형사인 벡스트룀과 그 동료들이 툭툭 쏟아내는 말은 여성과 동성애혐오, 인종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벡스트룀은 여성의 나이를 유통기한으로 본다.


"서른다섯에서 마흔다섯 살 사이로 보이니 여자로서 유통기한은 끝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적어도 몸매는 풍만한 쪽이군, 벡스트룀은 생각했다." -48쪽(1권)

벡스트룀과 그 동료들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 마리안 그로스는 그런 경찰에게 제대로 걸린 희생제물 신세다. 마흔 여섯의 폴란드 출신의 마리안 그로스는 단지 부모가 정치 난민이었던 이민자라 용의선상에 올랐다. 벡스트룀은 용의자의 이름과 직업, 독신이며 자녀가 없다는 것을 동성애와 연결시킨다. '표범의 무늬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법'이라고 믿는 그에게 프로파일링은 편견을 정당화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벡스트룀이 양손을 들어 상대의 말을 끊었다. "호모 자식이잖아. 자네, 신원 기록을 보고도 모르는 거여? 마리안이라니. 남자 이름이 뭐 그래? 사서, 독신, 자녀 없음." 벡스트룀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이 자식을 고발한 호모 새끼랑 애기 좀 해야겠어.""-112쪽(1권)

이민자와 흑인 등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와 반감을 드러내는 스웨덴 경찰이 소설 속 이야기에 그칠까 하는 궁금증이 일 정도로 벡스트룀과 그 동료들은 무능했다. 증거가 넘치는데도 경찰은 린다 발린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한 달 넘게 허우적거린다. 그러면서도 수사 경비 부정 시비가 있을 정도로 흥청망청, 가관이다. 전혀 어색하지 않고 익숙한 모습이다. 대한민국 경찰이라면 특수 활동비로 갈음했겠지만, 스웨덴 시스템은 좀 더 깐깐한 모양이다.

"이제 총 이만 크로나 가량의 수사 경비 관련 부정이 남았다. 용도 불명의 수차례의 현금 인출, 놀라울 정도의 세탁비 청구서, 개당 구십육 크로나인 화이트보드 지우개 서른한 개를 포함한 각종 사무용품 대금 청구서, 그의 동료 중 한 명의 방에서 봤다는 포르노 영화 시청료 청구서 및 다양하고 기괴한 지출 명목들이 있었다." -373쪽(2권)

<린다 살인 사건의 린다>은 범죄 수사물이긴 하지만, 블랙 유머와 풍자로 세상을 고발하는 사회 소설이기도 하다. 수사 경비 부정으로 재무과 내사를 받고, 성추행 수사를 받는 벡스트룀을 평가하는 대목을 보자. 뇌물로 인해 행복해 하는 그에게 정의감만큼은 투철하다고 말한다. 후해도 너무 후하다.

"병가 중인 그는 금방 중단될 성추행 수사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갈색 봉투엔 아직 상당한 금액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행복한 편이지, 암. 그래도 저 정신과 의사 놈은 진작에 어떻게 했어야 했어. 벡스트룀은 못난 인간이지만 정의감만큼은 투철한 사람이었다." - 369쪽(2권)

한편, 저자는 소설을 마무리하며 언론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와 살인 사건을 다룰 때 어떤 메시지가 함의되어 있는지를 독자에게 묻는다. 그래서 여성 피해자의 이름을 따서 사건을 명명하는 대한민국 현실과 맞닿아 잇는 부분이라 저자의 질문을 회피하기가 어렵다. 피해자 신상 털기는 기본이고, 끔찍한 범죄마저도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사회는 이미 타성에 젖었고, 그 어디에서도 인권감수성은 찾기 어렵다.

"오십 년간 이백여 명의 강간 살해 피해 여성이 살인 사건 앞에 이름으로 나왔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여성들은 어느 순간 언론에서 선호하는 기호로 단순 변환되었다. 기호학 용어에 따르면 그들은 일종의 상징이 되었다. 언론은 경찰이 용의자를 검거하는 그 순간까지도 피해 여성을 거듭 활용했다. 스무 살 수습 경찰인 린다 발린부터, 린다 살인 사건, 린다 살인자 등등, 사법절차의 마지막 순서까지 린다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 -327쪽(2권)

혹자는 인종과 여성 혐오로 가득한 이 소설이 에필로그를 젠더적 관점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은 뜬금없다고 하겠지만, 그래서 더욱 필요했던 관점이다. 언론은 나이가 많은 여성 피해자는 다루지 않는다. 신문이 팔리고, 괜찮은 그림, 재미있는 이야기는 마흔을 넘지 않은 특정 연령대여야 했다는 논문의 지적은 마초 형사 벡스트룀뿐만 아니라 여성을 소비하는 비뚤어진 관점을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린다 살인 사건의 린다 1

레이프 페르손 지음, 이유진 옮김,
엘릭시르, 2017


#살인사건 #이민자 혐오 #여성 혐오 #외국인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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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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