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님 댁에서 하룻밤 자고 가세요

싸우는 평화주의자, 쌍문동 <함석헌기념관>에 가다

등록 2017.07.21 14:08수정 2017.07.2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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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쌍문동은 드라마 '응답하라1988'의 배경이 됐던 동네다. 극중 '덕선이'(혜리 역)가 다녔던 정의여고에서 5분 정도 주택가 사이를 걷다보면 단정한 벽돌 가옥 하나를 마주하게 된다. 바로, 함석헌기념관이다.

함석헌기념관은 사회운동가이자 사상가인 함석헌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작은 기념관이다. 기념관이 일반 주택의 모습을 하고서 주택가에 위치한 이유는, 실제로 함석헌 선생이 말년을 보냈던 쌍문동 집을 개조해 지었기 때문이다.


기념관의 구조는 지상과 지하 각 1층인데, 함석헌 선생이 생전에 거주했던 공간은 지상 1층이다. 1층 집은 눈대중으로 대략 30평쯤 되어 보였다. 다른 기념관과 다르게 신발을 벗고 출입해야 했는데, 이 점이 더 실제 선생의 가정집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함석헌기념관에서 함석헌 선생의 방을 재현해 놓은 서재. 벽면에 간디 사진이 걸려있다.
함석헌기념관에서 함석헌 선생의 방을 재현해 놓은 서재. 벽면에 간디 사진이 걸려있다.신영수

1층 현관 오른쪽에는 함석헌 선생이 거처했던 서재를 재현해놓은 공간이 보였다. 책장에는 실제 선생이 두고 읽었던 책들이 그대로 꽂혀있는데, 기독교인이었던 선생이 두고 읽었던 <성경>이 보였다. 그 곁에는 <노자>와 <장자>가 눈에 띄었다.

벽에는 간디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선생은 생전에 간디가 인생의 지침서로 삼았던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를 우리말로 번역한 적이 있다. <날마다 한 생각>이라는 이름으로 간디 잠언집을 번역하기도 했었다.

성서와 노장, 바가바드기타까지. 기독교인이면서 동서양의 사상을 두루 섭렵했던, 역시 선생다운 서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 서재에는 선생의 상징인 하얀 두루마기 한복과 검은색 지팡이가 있어 선생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3.1운동부터 6월항쟁까지


 기념관 복도 벽면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연표가 게시되어 있다. 옆에 '씨알은 외롭지 않다'는 선생의 글씨가 보인다.
기념관 복도 벽면에는 함석헌 선생님의 일대기를 정리한 연표가 게시되어 있다. 옆에 '씨알은 외롭지 않다'는 선생의 글씨가 보인다.신영수

서재를 나오면, 복도 벽 한 면이 선생의 일대기를 요약한 연보로 가득 채워져 있다. 1901년부터 1989년까지 선생의 삶은 벽 한 면으로도 요약하기 모자란 우리나라 20세기 역사 그 자체였다.

1901년 근대화의 고장 평안북도에 태어난 선생은 그 유명한 오산학교에서 안창호, 조만식으로부터 민족정신과 신학문을 배웠다. 1919년 열아홉 살 되던 해에 3.1운동에 참여한 선생은 필화사건 등으로 몇 차례 경찰서에 수감되는 등, 일제의 탄압에 맞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이 장기독재를 이어가자, 장준하와 함께 <사상계>를 발간해 자유당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5.16쿠테타 이후에는 한일협정 반대, 삼선개헌 반대, 또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는 등 반독재투쟁에 앞장섰다.

1980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설 때에는, 선생의 나이 이미 여든이었음에도 반독재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을 맡아 6월 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89년 선생은 여든아홉의 나이로 작고했다. 일제부터 전두환까지,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투쟁의 역사였다.

강의 듣고, 차 마시고, 잠도 잘 수 있는 기념관

 함석헌기념관 마당에서 직원 분과 함께 찍은 필자와 친구들(왼쪽에서 세번째가 필자). 직원 분은 수필가였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 것은 물론 음료수와 책자, 본인이 쓴 책도 선물로 주셨다.
함석헌기념관 마당에서 직원 분과 함께 찍은 필자와 친구들(왼쪽에서 세번째가 필자). 직원 분은 수필가였다.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 것은 물론 음료수와 책자, 본인이 쓴 책도 선물로 주셨다. 신영수

1층에는 서재 외에도 선생의 글씨와 육필 원고, 선생의 삶을 정리한 영상을 볼 수 있는 영상관이 마련되어 있다. 1층에 기념관 직원이 한 분 계셨는데, 함석헌 선생을 존경해서 찾아 온 대학생이라고 소개하니, 매우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직원 분의 안내에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지하는 동네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돼 있었다.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그곳에는 작은 도서관이 있고,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커피와 차가 구비되어 있었다.

또 전시관과 세미나실이 있어서, 지역 주민들이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전시관을 대관해주고 있었다. 이 날도 작품들이 여럿 전시돼 있었다. 또 세미나실에서는 주민들 대상으로 인문학 강좌가 주기적으로 열리고 있었다.

무엇보다 세미나실에는 침대가 구비되어 있어서 숙박이 가능했다.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만 하면 저렴한 가격에 이용이 가능하다. 기념관 이전에 실제 함석헌 선생이 거주했던 집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잠을 청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처럼 함석헌기념관은 함석헌 선생의 자취를 보존하고 기념하는 것은 물론,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문화공간까지 두루 갖추어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함석헌기념관 방명록에 필자가 남긴 글. 전 교육부총리 한완상은 함석헌 선생님을 일컬어 '싸우는 평화주의자'라고 했다.
함석헌기념관 방명록에 필자가 남긴 글. 전 교육부총리 한완상은 함석헌 선생님을 일컬어 '싸우는 평화주의자'라고 했다.신영수

생전에 함석헌 선생은 씨알정신을 주창했다. 이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선생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다. '깨어있는' 시민이 마침표라면, '생각하는' 백성은 물음표다. 끝없이 고민하고 반성하는 변화의 삶을 인고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생은 여든이 넘어서까지, 그 대상이 바뀔지언정 싸움을 멈추지 않는, 변화의 삶을 살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변화의 시기를 맞이하는 지금, 하루쯤 선생의 집에서 묵으며 오늘날 선생의 삶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민주화운동 대학생 탐방에 선정돼, 친구들과 함께 2박3일간 민주화운동 관련 현장을 탐방했습니다. 그중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함석헌기념관 #함석헌 #쌍문동 #민주화운동 탐방 #씨알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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