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여행자의 죽음> M.C.비턴, 전행선 옮김. 현대문학 출판
현대문학
그 경찰은 M.C.비턴의 <여행자의 죽음>에 나오는 해미시 맥베스 경사다. 스코틀랜드 북부에 자리한 가상의 마을인 로흐두에서 해미시는 유일한 경찰이었다. 뜻하지 않게 승진을 하면서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청소에 집착하는 신참 순경 윌리를 부하로 두기 전까지 말이다.
"전 아무도 원치 않아요. 그냥 예전의 제 삶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윌리만 없어졌으면 좋겠다고요. 나 원 참, 이 권력이라는 게 참 끔찍한 거더라고요. 주변에 부릴 사람이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을 땐 사는 게 참 편하기 그지없었어요." -75p어떻게 하면 다시 혼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조용한 날을 보내던 해미시 경사는 평온했던 시골 마을에 두 명의 여행자들이 버스를 끌고 나타났을 때부터 촉각을 곤두세운다. 경찰 특유의 감이었는지, 단순한 편견이었는지 모르지만 해미시는 여행자를 자처하는 숀과 욕설을 입에 담고 사는 셰릴이 로흐두에서 문제가 될 것임을 직감한다.
반면, 마을 토박이들은 여행자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선의를 베푼다. 특별히 목사관 뒤 들판을 내어준 웰링턴 목사 부부는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생활 방식을 존중받아야만 한다며 해미스의 속을 긁어놓는다. 사실상 목사는 여행자의 삶을 동경했다. 목사가 보기에 여행자들은 아직 젊었고,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 갈 시간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마을에 얼씬도 못하기를 바라는 해미스의 바람을 무시하며 호의를 베푼다.
"그들의 삶의 방식에는 뭔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네. 나도 가끔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무작정 길을 떠나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거든." -22p그러나 젊고 매력적인 여행자 숀이 마을에 나타난 이후, 수상한 절도 사건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숀은 자신의 버스에서 망치에 맞아 죽는다. 숀의 죽음 이후 그가 약물과 협박으로 마을 사람들의 돈을 뜯어냈던 사실들이 밝혀진다.
이때부터 숀과 가까이 했던 여성들이 용의선상에 오르지만, 해미시는 용의자들을 추궁할 수 있는 증거를 갖고도 서두르지 않는다. 마을 사람 중에는 그런 해미시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신 정말 타고난 빈대로군요. 뭔가를 공짜로 얻을 수만 있다면, 살인도 눈감을 사람이에요." -71p그 정도였으면 해미시는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사건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미시는 주민들을 사랑했다. 사건에 감정적으로 휘말리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미시는 덮을 건 덮고, 캘 건 캐는 뚝심을 발휘한다. 그는 피의 사실을 슬쩍 흘리면서 피의자를 망신이나 주는 비열한 짓은 결코 않는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걸 즐기는 야비한 경찰이 아니라, 민중의 지팡이 그 자체였다.
<여행자의 죽음>은 아가사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처럼 추리를 통해 범죄를 해결해 가는 방식을 따르지만, 결이 다른 무언가가 있다. 반전에 반전을 더하고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맛은 덜하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누가 죽였는지보다, 왜 죽임을 당했는지에 대해 더 집중하고, 그 과정에서 속물근성을 가진 인간의 적나라한 밑바닥을 보게 한다. 1985년 <험단꾼의 죽음>을 시작으로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를 현재까지 31권을 발표한 M.C.비턴이 왜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대중작가로 꼽히는지도 알게 해 준다.
소설 속에서 자신은 선행에 지쳐 버린 어리석은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웰링턴 부인의 절규는 보여주는 삶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절규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여행자의 죽음>은 과시적인 인증 사진이 대변하듯, 인정 욕구에 목말라 있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추리물에서 인간성에 대해 이처럼 탁월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소설을 읽으며 느긋하면서도 인정 넘치고, 수사에는 송곳 같은 스코틀랜드 경찰을 부러워만 한다면 억울하고 괜히 꿀리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으며 우리도 그런 경찰을 일상에서 만날 날을 기대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여행자의 죽음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현대문학,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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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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