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를 악용한 여행자의 최후

<여행자의 죽음> 덮을 건 덮고 캘 건 캐는 스코틀랜드 경찰을 보다

등록 2017.09.11 08:57수정 2017.09.1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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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 경찰이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가짜 범인이라도 만들어 승진에 집착하는 <부당거래>의 출세 지향적 경찰,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때리지만 사건만큼은 끝까지 파헤치는 <공공의 적>의 열혈경찰, 경찰이 조폭인지 경찰인지 헷갈리게 만든 <신세계>, 최근 중국 동포에 대한 편견으로 물의를 일으킨 <청년경찰>까지 영화 속 경찰은 거칠고 친절과는 거리가 멀다.

현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경찰은 최근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로 인권 경찰로 거듭나겠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경찰은 무리한 체포와 구금, 영장 집행으로 인권 침해를 하고 조직 이익에만 충실한 집단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경찰은 그동안 집회 현장에 과도한 인력 배치와 차벽 설치로 명박산성을 만들었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또한, 백남기 농민 사건에서처럼 살인적인 살수차 운용으로 시민 안전과 보호는 안중에도 없어 견찰, 겁찰,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비난을 자초했다.

해방 이후 독립투사들을 고문하던 민족반역자들이 경찰 수뇌부를 차지하면서 시작된 대한민국 경찰의 반민주적이고 출세 지향적 모습은 문재인 정부라고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최근 물의를 일으킨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만 해도 경찰은 부실 수사라는 비난을 피하기에 급급해 가해 학생들을 두둔하여 온 국민의 분노를 샀다.

경찰에게는 언제나 조직 이익이 우선이었고, 자신들의 안위가 먼저였다. 물론 일선에는 그렇지 않은 경찰도 있겠지만, 드러나는 사건만 봤을 때 문재인 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인권경찰과 현재 경찰은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먼 듯하다.

그런 경찰에 대한 인식이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 실적이나 승진이라곤 관심도 없고, 부하 직원이 생기는 것도 달갑지 않다는 경찰을 보았을 때 너무나 신선했다. 어떻게든 출세해 보겠다는 욕심은 털끝만큼도 없고, 느긋하고 여유가 넘치는 업무 태도는 무능력하게 보이기보다 자신의 직업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 따뜻한 전문 직업인의 전형으로 보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모함하는 상사나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동네 사람들의 허물을 덮어주면서도 송곳 같은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해 내는 실력은 혀를 내두르게 했다. 사실 대한민국에도 이런 경찰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은근 질투를 일으켰다.


선의를 악용한 여행자의 최후

책 표지 <여행자의 죽음> M.C.비턴, 전행선 옮김. 현대문학 출판
책 표지<여행자의 죽음> M.C.비턴, 전행선 옮김. 현대문학 출판현대문학
그 경찰은 M.C.비턴의 <여행자의 죽음>에 나오는 해미시 맥베스 경사다. 스코틀랜드 북부에 자리한 가상의 마을인 로흐두에서 해미시는 유일한 경찰이었다. 뜻하지 않게 승진을 하면서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청소에 집착하는 신참 순경 윌리를 부하로 두기 전까지 말이다.


"전 아무도 원치 않아요. 그냥 예전의 제 삶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윌리만 없어졌으면 좋겠다고요. 나 원 참, 이 권력이라는 게 참 끔찍한 거더라고요. 주변에 부릴 사람이 나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을 땐 사는 게 참 편하기 그지없었어요." -75p

어떻게 하면 다시 혼자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조용한 날을 보내던 해미시 경사는 평온했던 시골 마을에 두 명의 여행자들이 버스를 끌고 나타났을 때부터 촉각을 곤두세운다. 경찰 특유의 감이었는지, 단순한 편견이었는지 모르지만 해미시는 여행자를 자처하는 숀과 욕설을 입에 담고 사는 셰릴이 로흐두에서 문제가 될 것임을 직감한다.

반면, 마을 토박이들은 여행자들에 대해 호감을 갖고 선의를 베푼다. 특별히 목사관 뒤 들판을 내어준 웰링턴 목사 부부는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생활 방식을 존중받아야만 한다며 해미스의 속을 긁어놓는다. 사실상 목사는 여행자의 삶을 동경했다. 목사가 보기에 여행자들은 아직 젊었고, 책임감 있는 인간으로 성장해 갈 시간이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마을에 얼씬도 못하기를 바라는 해미스의 바람을 무시하며 호의를 베푼다.

"그들의 삶의 방식에는 뭔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네. 나도 가끔 모든 책임을 내려놓고 무작정 길을 떠나 세상을 돌아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거든." -22p

그러나 젊고 매력적인 여행자 숀이 마을에 나타난 이후, 수상한 절도 사건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숀은 자신의 버스에서 망치에 맞아 죽는다. 숀의 죽음 이후 그가 약물과 협박으로 마을 사람들의 돈을 뜯어냈던 사실들이 밝혀진다.

이때부터 숀과 가까이 했던 여성들이 용의선상에 오르지만, 해미시는 용의자들을 추궁할 수 있는 증거를 갖고도 서두르지 않는다. 마을 사람 중에는 그런 해미시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신 정말 타고난 빈대로군요. 뭔가를 공짜로 얻을 수만 있다면, 살인도 눈감을 사람이에요." -71p

그 정도였으면 해미시는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라도 사건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해미시는 주민들을 사랑했다. 사건에 감정적으로 휘말리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미시는 덮을 건 덮고, 캘 건 캐는 뚝심을 발휘한다. 그는 피의 사실을 슬쩍 흘리면서 피의자를 망신이나 주는 비열한 짓은 결코 않는다.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걸 즐기는 야비한 경찰이 아니라, 민중의 지팡이 그 자체였다.

<여행자의 죽음>은 아가사 크리스티나 코난 도일의 소설에서처럼 추리를 통해 범죄를 해결해 가는 방식을 따르지만, 결이 다른 무언가가 있다. 반전에 반전을 더하고 심장을 쫄깃하게 하는 맛은 덜하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그래서 누가 죽였는지보다, 왜 죽임을 당했는지에 대해 더 집중하고, 그 과정에서 속물근성을 가진 인간의 적나라한 밑바닥을 보게 한다. 1985년 <험단꾼의 죽음>을 시작으로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를 현재까지 31권을 발표한 M.C.비턴이 왜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대중작가로 꼽히는지도 알게 해 준다.

소설 속에서 자신은 선행에 지쳐 버린 어리석은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웰링턴 부인의 절규는 보여주는 삶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절규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여행자의 죽음>은 과시적인 인증 사진이 대변하듯, 인정 욕구에 목말라 있는 현대인들의 심리를 풍자하는 블랙코미디이기도 하다. 추리물에서 인간성에 대해 이처럼 탁월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소설을 읽으며 느긋하면서도 인정 넘치고, 수사에는 송곳 같은 스코틀랜드 경찰을 부러워만 한다면 억울하고 괜히 꿀리는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읽으며 우리도 그런 경찰을 일상에서 만날 날을 기대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여행자의 죽음

M. C. 비턴 지음, 전행선 옮김,
현대문학, 2017


#여행자의 죽음 #경찰 #여행자 #선의 #살인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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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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