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에 따라오신 아버지(왼쪽)와 선생님(오른쪽) 앞줄 흰스타딩 신은 아이가 나
나관호
정직해라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문구회사에 취직하셨다. 그 회사는 직원들이 모두 합숙을 해야 했는데 당시에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사장 부인이 직원들을 모아 놓고 이가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가 있었지만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랬더니 주위 동료들은 키득거리며 아버지를 비웃었다. 사장 부인이 아버지를 불러냈다. 동료들은 그런 모습에 손가락질까지 하며 더더욱 아버지의 행동이 어리석다는 듯이 조롱했다. 사실 사장 부인이 이가 있는 사람을 찾은 것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겨울 내복 두 벌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아 승진했고, 몇 년 후에는 문구공장의 책임자가 되셨다. 아버지는 회사에서 일본 유학을 주선할 정도로 인정받으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실 수 있었다. 그 당시 만년필 속에 독립자금을 넣어 전달했던 이야기도 들었다.
아버지의 정직한 행동은 해방 이후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사업을 할 때도 이어졌다.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나라의 녹을 먹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마음만 먹으면 공출되는 쌀을 개인이 착복할 수 있는 구멍이 많았다. 조합장인 아버지에게 그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쌀 한 톨도 집으로 가져오지 않으셨다. 몇 년 후 시행된 비리 감사에 아버지만 걸리지 않았고, 그 결과로 표창을 받으신 일을 늘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입장 바꿔 생각해라6.25전쟁 때 동네 유지와 지식인들이 모두 공산군에게 잡혀 중학교 강당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도 예외가 되실 수는 없었는데, 아버지를 찾아낸 것은 어느 부잣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다 공산당원이 된 사람들이었다.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아버지를 구해 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 역시 머슴으로 일하던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그 집에 갔을 때, 그 사람 동생이 소아마비로 아픈 것을 보고 한의사 친구에게 말해 한약을 지어다 준 작은 친절이 아버지의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때 생각을 가끔 하신다며 내 손을 꽉 잡으시곤 했다.
아버지는 내가 아끼던 축구공과 야구 글러브가 없어졌을 때 다른 아이들이 내 것을 가지고 있어도 훔쳐간 것을 본 것이 아니면 그냥 잊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약해 보였고 화가 났다. 결국은 그 집 개에 물려 피를 흘렸다. 그래도 아버지는 글러브를 찾아 주시지 않으셨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 새를 살다가 집세를 내지 않고 도망간 사람을 이해하셨고 엿장수 아저씨들이 입금시키지 못한 돈도 눈감아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