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선인 집행위원회를 자원한 1. 장영달 2. 박우섭 3. 연성수 4. 박계동 5. 이범영 6. 홍성엽
민청련동지회
연성수의 참여는 회의 전에 이미 예정돼 있었다. 연성수는 1975년 5월 서울대 식물학과 2학년에 재학 중 이른바 '오둘둘 사건'(5월 22일 서울대에서 긴급조치9호에 반대하여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학생시위)에 주동자로 참여해 징역을 살았다.
학생 때부터 반유신 문화운동패인 '가면극회'의 일원이었던 연성수는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민중문화운동판을 떠나지 않고, 김민기, 채희완, 홍석화, 황선진 등과 함께 현장극단운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한두레'라는 이름으로 아현동에 애오개소극장을 열고 '진오귀굿', '예수전' 등 저항성 강한 마당극을 무대에 올리고,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터 등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공연을 하기도 했다.
이런 그가 민청련 집행부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것은 민중극단 한두레 모임에서였던 것 같다. 당시 학교, 학번별로 이루어졌던 민청련 기반조직 모임과 달리 별도의 논의 단위를 형성하고 있던 문화운동 쪽은 황선진과 김도연이 대표로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을 통해 집행부 참여를 권유받은 연성수는 큰 고민 없이 집행부 참여를 결정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내 자신이 민중 출신이다. 그리고 문화판에서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이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는 생각으로 참여를 결정했다고 한다. 아내 이기연과도 의논하여 동의를 얻었고, 연로한 어머니가 반대할 것을 염려했으나 아들의 단호한 결심에 어머니도 따라주었다.
이범영도 집행위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김근태 의장이 기반 조직을 오랫동안 조직하고 관리해 온 이범영에게 뒤에 남아서 계속해서 기반 조직을 관리해주도록 부탁했다.
모임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무슨 일이든 맡겨주면 기꺼이 하겠노라고 김근태 의장에게 일임했던 장영달도 집행위에 포함시켰다. 집행위원들 간에 부서도 정했다. 총무와 재정을 나누어 총무부장에 박우섭, 재정부장에 홍성엽, 그리고 홍보부장 박계동, 사회부장 연성수로 정했다. 사회부장 연성수는 노동현장과 연결고리 역할을 해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일단 창립총회에서는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했다. 장영달은 연배를 고려하여 부의장으로 내정했다.